1명의 범인, 3명의 연기자
화성연쇄살인사건을 테마로 삼은 <살인의 추억>. 실제 사건의 범인이 아직 누구인지 모르는 것처럼 영화에서도 범인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단 두 번 범인의 모습이 언뜻 비쳐질 뿐이다.
▲ 촬영세트인 파출소를 배경으로 모인 출연진. | ||
그러나 영화에서는 삭제됐지만 범인이 등장하는 장면이 또 하나 있다. 애초 구상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번잡한 명동 거리에서 ‘범인으로 보여지는 남성의 뒷모습’이 서서히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신. 그러니까 원래 시나리오상에서 범인의 모습은 전부 세 번 등장하게 되어 있던 것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이 세 장면을 촬영할 때 매번 다른 연기자를 내세웠다. 논두렁 신에서는 영화 속의 다른 장면에는 출연하지 않는 단역배우를 썼다. 범인의 손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받은 박현규(박해일 분)의 손이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장면은 스태프 중 한 명이었던 영화 조감독의 뒷모습을 담았다.
이렇게 한 명의 범인을 묘사하기 위해 세 명의 연기자를 쓴 것은 관객들이 신체적인 특징과 분위기만으로는 결코 범인을 유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재미 더한 송강호의 애드리브
형사 박두만 역할을 한 송강호의 기발한 애드리브가 영화 곳곳에 묻어나면서 그 재미를 더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형사 서태윤(김상경 분)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송강호는 특유의 재치있는 애드리브와 호쾌한 ‘날아차기’를 선보였다. 서태윤을 성폭행범으로 오인했던 것.
애초 시나리오에는 ‘단숨에 뛰어가서 한방 날린다’ 정도로만 설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송강호의 입은 쉬지 않았다. 그는 “여기가 콩밭이야?,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라고 비아냥거리며 ‘한방’이 아니라 아예 몸을 날렸다.
최초의 현장검증 장면에서 송강호가 한 대사 역시 모두 애드리브였다. ‘아, 이거 현장 보존도 안되고, 이거 뭐야?’, ‘논두렁에 꿀 발라놨냐?’(형사와 현장검증 요원이 논두렁을 내려오면서 계속 넘어지자), ‘XXX 기자 왔어? 아이구, 그 놈 안나오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가 그것.
또 영화의 후반부에서 서태윤이 갈대밭에서 새로운 피해자의 시체를 찾아내자 ‘심술’이 난 송강호가 ‘저기 뱀 많은데, 뱀’이라고 했던 대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대사는 후시작업(촬영이 끝난 후 다시 더빙을 하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애드리브다. 이 장면은 입이 보이지 않고 형사들의 뒷모습만 보여져서 첨가할 수 있었던 대사라고 한다.
편집된 장면, 뒤바뀐 역할
극중 박두만의 애인인 곽설영(전미선 분). 애초에 박두만은 부인이 있는 유부남이었고 곽설영은 박두만과 ‘불륜관계’로 설정되어 있었다. 박두만이 곽설영과 만나는 장면의 대부분이 여관이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였다. 하지만 제작진은 전미선의 분위기와 박두만과의 관계 자체가 ‘느낌이 좋다’고 판단, 아예 박두만을 총각으로 재설정했고 결국 곽설영과 결혼을 하게 되는 스토리로 가닥을 잡았다.
여기서 애꿎게 피해를 본 사람은 원래 박두만의 부인 역할을 하기로 했던 여자 연기자. 캐스팅까지 모두 마치고 촬영 준비만 하고 있던 그녀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고.
영화의 후반부,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한 형사 서태윤이 기차터널에서 박현규에게 총을 쏜 그 다음 장면도 삭제됐다. 서태윤이 형사로서의 책임감과 죄책감에 시달려 취조실에서 피해 여성들의 환영에 시달리며 점점 미쳐 가는 장면이 그것이다.
<살인의 추억>의 김무령 PD는 가장 힘들었던 장면에 대해 “경남 사천의 한 기차 터널에서 찍은 격투와 총격 신이었다. 날씨 자체가 엄청나게 추웠을 뿐더러 겨울이라 해가 짧아서 촬영 시간이 부족했다”며 “애초 3일 정도로 잡은 작업이 무려 10일이나 걸렸다”고 말했다.
이남훈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