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의 마지막 날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박근혜 대표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해 말 4대 입법 처리 과정에서 초강경 보수입장을 고수해 ‘당심’을 얻어 대세를 장악한 듯했던 박 대표의 리더십에 대한 문제제기가 공공연히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흐름은 박 대표와 그간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소장파 그룹뿐 아니라 지역적 지지기반인 영남보수 그룹에서도 나오고 있어 박 대표를 잔뜩 긴장시키고 있다. 특히 이들은 박 대표가 ‘제2 창당’에 버금가는 당쇄신 차원에서 야심차게 추진중인 당명 개정과 당의 이념과 노선문제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당 개혁안이 좌절될 경우 박 대표는 리더십 훼손은 물론 공고한 당내기반을 적극 활용해 ‘박근혜 대세론’을 확산시킨다는 대권 프로그램 전략도 수정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당명 개정이나 당의 노선 문제는 둘 다 양보할 수 없는 ‘카드’인데다, 보수파와 소장파들의 의견이 엇갈려 두 그룹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묘수’ 또한 없다는 점이 박 대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박 대표의 보수 회귀 성향을 비판하고 있는 소장파들은 박 대표가 이번에 개혁와 변화에 대한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정풍운동이라도 벌일 태세다. 소장파들은 ‘박 대표 불가론’을 주장해온 이재오 홍준표 의원 등 당내 비주류 세력과의 연대도 모색중인 것으로 알려져 박 대표 비토그룹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당내 중도그룹까지 당명 개정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손을 들어주고 나서는 등 박 대표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여권이 ‘박 대표 죽이기’에 나섰고, 당내 잠재적 대권 후보 경쟁자인 이명박 서울시장과 손학규 경기지사의 도전도 거세지고 있어 박 대표는 이래 저래 당 안팎에서 궁지에 몰리게 된 셈이다.
박 대표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는 당내 문제들을 원만히 해결하지 못하고, 리더십을 상실할 경우 한나라당에서 ‘박근혜 용도폐기론’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우선 보수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박 대표가 추진중인 당 개혁의 최대 역점사업인 당명 개정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당내 보수파 모임인 ‘자유포럼’의 대표격인 이방호 의원은 “당명개정은 다른 정치세력과의 결합 등 지각변동이 일어날 때 하는 것”이라며 “박 대표가 의총에서 당명개정을 시도한다면 분명하게 반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당 대표가 바뀔 때마다 당을 ‘사당화’하는 수단으로 당 이름을 바꿔왔다”며 “이런 오해가 상존하는 상황에서 당명 개정은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
이상배 의원도 “2월 국회를 대비해,국보법을 비롯한 현안에 모두 매달려야 하는 마당에 무슨 당명개혁이냐”고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당내 ‘475세대’들이 주축을 이룬 ‘푸른정책연구모임’은 지난 8일 제주도에서 워크숍을 갖고, ”당명개정은 의미있는 일이나, 시기적으로 지금 당장하는 것보다는 4월 재보궐선거 등의 정치적 일정을 봐가며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모았다. 박진 임태희 권영세 유승민 김정훈 김충환 정두언 최경환 나경원 이혜훈 의원 등으로 구성된 푸른정책연구모임은 당내 모임 가운데 ‘국민생각’과 함께 대표적인 중도그룹이다.
보수파에 이어 중도파까지 당명 개정에 반대하는 것은 4월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당명을 개정하는 것은 유권자의 혼선을 초래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실제로는 박 대표의 ‘독주’를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더 커 보인다.
당의 한 인사는 “박 대표가 당명 개정 등을 통해 입지를 공고화할 경우 경쟁자인 이명박 서울시장과 손학규 경기지사는 설 땅이 없어진다”며 “이럴 경우 세 사람의 대권 후보 경쟁을 통해 당의 이미지와 경쟁력을 제고시켜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해야 하는 한나라당으로서는 박 대표가 혼자 뛰어나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박 대표가 대권 후보로서 검증이 끝나지 않았고, 경쟁력을 갖췄는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박 대표의 대세론 확산에 이용될 수 있는 당명 개정은 막겠다는 뜻이다. 이는 당내 비주류의 ‘박근혜 불가론’과 맥이 닿아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폭발 일보 직전까지 와 있는 소장파들의 불만이다. 이들은 4대 입법 과정에서 드러난 박 대표의 보수성향에 대해 노선투쟁을 선언해 놓은 상태다.
소장파인 이성권 의원은 “한나라당 지지층이 요구하는 것은 여야간 정치싸움에서 이기라는 게 아니다. 그런 걸로 박수를 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황을 완전히 오판한 것”이라며 “4대 법안을 갖고 싸웠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당 지지도 답보밖에 없었다”며 4대 법안 투쟁을 진두진휘한 박 대표를 비판했다.
이 의원은 “한나라당이 지난해 보였던 강경한 투쟁노선, 시대적 변화를 읽지 못하는 보수적 색채를 빨리 털어내는 게 중요하다”며 “당의 보수노선을 탈피하지 않고 당직개편을 하면서 소장파를 구색 맞추기로 끼워넣는다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소장파 한 의원은 “4대 입법 처리 과정을 통해 박 대표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며 “한나라당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는 유연성 있는 리더십이 필요한데 박 대표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고 박 대표 한계론을 지적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당내 비주류와 개혁연대를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오는 20일쯤 미국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 대거 참여하는 소장파들은 미국에서 다시 모임을 갖고 구체적인 대책을 논의키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의 한 중진의원은 “이회창 전 총재에게 두 번씩이나 조기에 올인했다가 패배를 맛 본 의원들은 박 대표에게 힘을 몰아주는 대신 다른 경쟁자들과의 경쟁을 유도할 것”이라며 “박 대표가 당명 개정과 보수적인 노선을 견지할 경우 엄청난 저항에 직면하게 될 수 있고, 자칫 박 대표의 조기 낙마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유영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