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커처=장영석 기자
우선 세대교체의 계속이다. 이번 인사에서 지난해 3월 부회장으로 승진시켰던 안병모 부회장이 경질됐다. 안 부회장은 현대차그룹의 미국 사업을 총괄해 온 인물이다. 1950년생으로 올해 66세다. 지난해에는 설영흥(71), 최한영(64), 한규환(65), 박승하(65), 김원갑(64) 부회장 등 원로급 부회장들이 모두 물러났다.
안 부회장까지 물러나면서 현대차그룹에 남은 부회장은 노무총괄 윤여철(65), 생산총괄 신종운(65), 전략기획 김용환(60), 연구개발 양웅철(62), 현대파워텍 김해진(58), 기아차 대표이사 이형근(64), 현대제철 우유철(58) 부회장 등 7명이다. 50대인 우 부회장과 김해진 부회장은 지난해와 올해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지난해와 승진한 기아차 강학서 사장과 현대차 이원희 사장도 각각 58세, 56세다. 이전보다 한결 젊어진 진용이다.
현직 부회장단은 ‘왕자의 난’과는 인연이 깊지 않은 자동차 전문가(단 우유철 부회장은 현대중공업 출신)들이다. 안 부회장은 정 회장이 젊은 시절부터 직접 키워 친정이나 마찬가지인 현대(현재 현대모비스) 출신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현대정공 출신은 성골인 오너 일가에 이어 그룹내 ‘진골’ 대접을 받았다. 지금은 물러났지만 한때 정 회장의 총애를 받던 유인균 회장, 박정인 회장, 이정대, 김무일 부회장 등이 모두 현대정공 출신이다. 하지만 안 부회장의 퇴진으로 현대차 부회장단에서 공신이라 할 수 있는 정공 출신은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확실히 책임을 묻는 정 회장의 인사스타일도 엿볼 수 있다. 정 회장은 지난해 8월 휴가 기간 중 느닷없이 미국을 방문했다. 15개월 만의 방문이었다. 그런데 올 3월 8개월 만에 다시 미국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미국 출장에서 돌아 온 후 해외영업라인 수뇌부를 바꾼다. 해외영업을 총괄하는 해외영업본부장을 교체하고, 미국과 유럽의 판매전략을 책임진 판매실장들을 맞바꾼다. 지역별 판매책임자는 보통 해당 지역에 대한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지역간 판매전문가 교류는 그리 잦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자극을 준 셈이다.
도대체 지난 8개월 새 미국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0%를 넘던 현대·기아차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지난 2월 7%대까지 뚝 떨어진다. 반대로 엔저와 유로약세를 앞세운 일본과 독일 업체들과 정부 보조금지원을 등에 업은 미국 업체들은 대부분 점유율을 높였다. 정 회장이 다녀간 후에는 실적이 오르는 게 보통인데, 반대 현상이 나타난 셈이다.
현대차그룹 사정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8개월 새 문제개선이 전혀 없었다면 정 회장이 상당히 진노할 만한 상황”이라면서 “이는 결국 지난해 실적이 좋지 않았던 미국과 유럽 판매조직에 대한 수술로 이어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미 유럽의 경우에도 지난해 현대차는 시장성장률에 판매증가율이 못 미치며 점유율이 하락했다. 벼르고 벼르던 정 회장이 결국 해외영업 부문 수술을 위한 메스를 든 셈이다.
지난해 8월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미국 앨라배마 공장을 방문했을 당시 모습.
정 회장은 지난해 3월에도 중국 출장을 다녀온 후 설영흥 부회장을 퇴진시키고, 대신 최성기 사장을 중국총괄로 임명하면서 조직개편까지 단행했다. 지난해 현대차는 중국 충칭에 새 공장을 짓기로 계획을 세웠지만, 현재 베이징 공장이 속한 허베이성의 반대로 난관에 부딪혔었다. 화교 출신으로 정 회장의 60년 지기인 설 부회장이지만 허베이성의 반대를 꺾지 못했던 셈이다. 결국 현대차는 충칭과 함께 허베이성 내 창저우에도 따로 공장을 짓기로 했고, 최근 정의선 부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도 가졌다.
전직 현대차그룹 임원인 A 씨는 “잘 모르는 사람이 볼 때 정 회장의 인사스타일은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잘 살펴보면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서 “이는 정 회장뿐 아니라 선친인 정주영 창업회장도 마찬가지였다”고 귀띔했다.
올 들어 처음으로 이뤄진 인사가 해외영업 쪽이지만, 향후 다른 부문에서 수시 인사가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현대·기아차가 극복해야 할 현안들이 워낙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당장 노조와의 갈등은 발등의 불이다. 통상임금 문제는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고,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노조와의 협상도 파행됐다. 지난해에도 기아차 이삼웅 사장이 임금 및 단체협상이 끝난 직후 사퇴했다. 당시 기아차는 협상 장기화로 막대한 생산차질을 겪어야 했다.
내수시장에서는 수입차의 공세가 거세다. 최근 현대차 국내영업본부는 ‘내수점유율 41%를 지켜라’는 특명을 일선 영업조직에 내렸다. 한때 80%에 육박했던 현대기아차 내수점유율은 70% 아래로 떨어진 것은 물론 60%대도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를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언제 정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질 지 알 수 없다.
재계 관계자는 “꼬박꼬박 연말에만 인사를 하던 삼성도 지난해에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기 직전 미래전략실과 삼성전자 등에서 일부 사장단 인사를 단행했었다”면서 “경영환경은 급변하는데 총수들의 나이는 많아지면서 이제는 인사 수요가 생기면 곧바로 실행, 경영효율을 극대화하려는 모습이다”라고 분석했다.
한편 정 회장의 세대교체 인사를 정의선 부회장의 후계구도를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장단부터 차츰 1950년 후반, 또는 1960년대 초반 생으로 물갈이하면 임원진도 1960년대 생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70년생인 정 부회장에게 1950년대생 임원들은 ‘삼촌’뻘이지만, 1960년대 생이면 ‘형님’뻘로 간극이 좁아진다. 하지만 대기업 오너가들이 ‘전문경영인’들에게도 막중한 권한과 책임을 주는 진정한 의미의 인적 쇄신을 하지 않는 한 누구로 바꾼다 해도 ‘심부름꾼’에 불과할 것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게 나온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