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대 국회의원 가운데 비리혐의로 구속된 첫 사례인 박혁규 의원 사건이 ‘게이트’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 ||
17대 국회의원 가운데 비리 혐의로 구속된 첫 사례여서 바라보는 시선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박 의원 사건과 관련된 새로운 의혹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그동안 정치인 관련 ‘개인 비리사건’이 수사 과정에서 또 다른 정관계 인사까지 연루된 ‘게이트’로 비화되는 경우는 종종 목격됐다. 이번 사건도 박 의원 개인 사건에 그치지 않고 정관계 인사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게이트’일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여의도 정가와 서초동 검찰 안팎에선 박 의원 사건과 관련지어 거물급 정관계 인사 리스트까지 나돌고 있는 상황이다.
박 의원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지난해 12월15일 김용규 경기도 광주시장이 구속되면서부터다.
아파트 건축 인허가와 관련해서 한 건설업체로부터 8억원을 뇌물로 받았다는 혐의였다. 그러면서 김 시장과 절친한 관계인 박 의원이 연루됐다는 단서도 포착한 검찰이 같은 혐의로 박 의원을 구속(1월6일)하기에 이른다.
검찰은 박 의원과 김 시장 두 사람을 구속하면서 “건설업체 관계자로부터 지난 2002년 5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광주시 오포읍 일대에 아파트 건축을 인허가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뇌물을 받은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검찰이 적시한 뇌물수수 기간은 박 의원의 경우 16·17대 국회의원이었고, 김 시장은 경기도의회 의원과 광주시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박 의원을 겨냥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던 지난해 12월28일 박 의원은 “인허가 청탁과 관련해서 금품을 받은 적이 없다”며 혐의 내용을 부인했다. 하지만 구속영장이 청구된 지난 6일 그는 “권아무개씨(박 의원과 김 시장에게 뇌물을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는 건설업체 명예회장)와는 주로 부동산에 관한 정보만 주고받았다. 주택조합사업 인허가 등과 관련해선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면서도 “권씨로부터 돈을 일부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적인 채권·채무 관계에 따른 것일 뿐 대가성 있는 돈은 아니다. 재판에서 밝히겠다”고 해명한 다음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한 상태다. 한나라당은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고 청렴한 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해 당과 개인의 부정비리는 철저하게 배격한다는 당의 원칙은 확고하다”는 보도자료를 뿌렸다. 그러면서 17대 총선 당시 국민과 약속했던 대로 “당 인사가 부정부패나 비리로 형이 확정되면 출당조치 하겠다”는 입장만 강조했다.
지난 16대 국회 시절만 해도 당 소속 의원들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 ‘야당탄압 수사’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17대 국회가 개원한 직후인 지난해 6월, 박 의원의 혐의와 다르긴 하지만 당시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았던 한나라당 박창달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 처리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해선 이 같은 반발이 쏙 들어갔다. 당 지도부를 비롯해 소속 의원 누구도 “야당 탄압이다” “표적수사다”라고 ‘저항’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당 차원에서 수수방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한나라당 이정현 부대변인은 “당은 박혁규 의원 건에 대해서 진실을 모르고 있다. 박 의원 측은 개인 채무변제라고 말하고 있다. 한 개인으로서, 또 정치인으로서 박 의원의 말을 존중한다”는 입장만 밝혔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도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을 가지고 야당의원 표적수사라고 반발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게 사실”이라며 “이제 초기 수사 단계인 만큼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정가와 수사기관 안팎에선 ‘박혁규 사건’이 ‘게이트’로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정치권에서 박 의원이 경기도의원 시절(91년~2000년 2월)부터 지역 업체들의 각종 인허가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과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불거지고 있다”며 “이런 루머들의 사실 여부는 좀 더 수사가 진행돼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난 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박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 실질심사 과정에서 박 의원 등에게 금품을 전달한 건설업체 명예회장인 권씨로부터 압수한 수첩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이 수첩에는 박 의원 이외에도 상당수 정관계 인사들의 명단이 적혀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검찰에선 이 수첩에 적혀 있는 인사들에게도 로비 자금이 제공됐는지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검찰은 “이 수첩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혀, 궁금증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여기에 대검 중수부는 최근 이 사건과 관련된 첩보를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넘긴 것으로도 알려졌다. 검찰은 “박 의원 사건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경기도 광주지역의 전반적인 개발비리 의혹을 파헤치기 위한 첩보였다”고만 언급했다.
하지만 검찰 소식통에 따르면, 이번에 대검에서 성남지청에 넘긴 첩보 내용 가운데는 박 의원 사건과 연루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관계 인사 리스트도 넘어갔다는 것. 이 리스트는 검찰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입수한 첩보를 근거로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리스트에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거물급 정관계 인사들이 포함돼 있다.
검찰 첩보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그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리스트에는 주로 박 의원과 절친한 것으로 알려진 인사들이 언급돼 있다. 야권 중진급인 P의원과 L의원, K의원 그리고 자치단체장 2명 등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박 의원은 P의원 등과 번갈아가며 경기도 곤지암 인근 식당에서 가끔 회식 자리를 가졌던 것으로 전해졌다”며 “이들 사이에 어떤 커넥션이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잊을 만하면 한번씩 불거지는 정치인 비리의혹 사건. 그리고 정치인 사건이 터질 때마다 수학공식처럼 이어지는 게 바로 ‘대형 게이트’로 비화할 것이냐는 관측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박 의원 사건도 그가 구속된 지 20여 일이 경과한 시점에서 ‘게이트’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검찰도 먼발치에서 어렴풋이나마 이번 사건과 연관된 ‘그림자’를 본 것 같다. 하지만 그 그림자의 실체가 ‘거물급 인사’인지 아니면 ‘피라미’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