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3극 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는 1973년 7월에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전 미국 국무장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등의 주도아래 미국, 유럽, 일본의 전직 고위 관리와 재계인사가 세계안보국가들이 직면한 현안들을 풀기 위해 상호 논의와 협력을 강화하고자 만들어졌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 북미지역, 유럽, 아시아 전체로 참가대상을 확대 하였으며, 매년 상반기 3개 대륙이 돌아가면서 개최되는데, 3개 대륙 전체연례회의(Plenary Meeting)는 올해 서울에서 열렸다.
3극 위원회는 유럽그룹으로 장 클로드 트리셰 (Jean-Claude Trichet, 전 유럽중앙은행총재)를 회장으로 173명으로 되어 있으며, 북미그룹으로는 조지프 나이(Joseph S. Nye, 전 美국가정보위원회 의장,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 석좌교수)를 회장으로 120명, 마지막 아태 그룹은 야스치카 하세가와(Yasuchika Hasegawa, TAKEDA 회장)가 회장을 맡아 9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측에서는 한승주(국제정책연구원 이사장, 前 외무부 장관)가 한국위원회 위원장을 홍석현(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이 아태지역 부회장으로 참여하고 있다.
다음은 정 의장의 3극위원회 전체연례회의 개막연설 전문이다.
“의(義)로써 화(和)를 이룬다”
- 통일 대한민국의 평화비전 -
2015. 4. 25(토) 09:00 / TC 회의 기조연설(案)
야스치카 하세가와 회장님(*아태그룹 의장/금번 회의 의장),
조지프 나이(Joseph S. Nye Jr.) 석좌교수님(*북미그룹 의장),
장 클로드 트리셰(Jean-Claude Trichet) 前 총재님(*유럽그룹 의장),
그리고 각국의 석학과 귀빈 여러분,
12년 만에 서울에서 개최되는 3극 위원회(The Trilateral Commission) 총회 참석을 위해 방한하신 모든 분들께 따듯한 환영의 말씀을 드립니다.
금년 회의를 이처럼 성대하게 준비해주신 한승주 이사장님, 홍석현 회장님을 비롯한 한국위원회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TC 회의는 지난 1973년 설립 이후 북미, 유럽, 아태지역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여러 현안에 대한 냉철한 진단과 지혜로운 처방을 내놓으며 국제사회에 많은 기여를 해왔습니다.
세계적인 석학들과 전문가들이 집결한 이 중요한 자리에서, 제가 우리 시대의 과제와 통일 대한민국의 평화비전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세계를 휩쓴 2차 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 국제사회는 그 당시 인류가 UN을 창설하며 꿈꾸었던 희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정학적 갈등은 여전하고, 극단주의적 테러와 대량살상무기 확산과 같은 새로운 위협이 대두되고 있으며, 경제위기와 기후변화 등 다양한 글로벌 도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교통‧통신망의 발달에 따라 국제사회의 복합적인 연계성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발생한 사건이 우리의 삶에 즉각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지난 2008년의 미국發 금융위기가 전염병처럼 퍼져서 세계 각국이 동시다발적인 위기에 빠지고,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에볼라 바이러스가 지구촌 전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사례입니다.
오늘날의 세계가 70년 전보다 더 가까워지고 더 성장한 것은 분명하나, 더 평화로워지고 더 살기 좋아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지금이 바로 우리 인류가 처한 위기를 바르게 진단하고 ‘살기 좋은 지구’를 만들어갈 새로운 대안을 만들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21세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21세기는 ‘문명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경제적으로 부를 쌓아 무기를 개발하고, 타국의 희생을 바탕으로 패권국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던 낡은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현재의 각국 군사력만 해도 지구 전체가 공멸하고도 남습니다.
한 나라의 힘으로 세계의 문제를 풀 수도 없고, 장벽을 둘러치고 혼자 잘 살 수도 없는 시대입니다. 결국, 21세기 문명의 시대는 각국이 인문과 문화의 꽃을 피워 상호 협력하는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각국이 경쟁적으로 경제를 부흥하려는 이유도 세계의 가난하고 힘든 나라를 구제하고 각국의 국민들이 다함께 더불어 잘살기 위해서라야 합니다. 그래야 지구촌이 조화롭고 지속적인 발전을 이어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석학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저는 ‘21세기 문명의 시대’의 핵심가치로 ‘義’(Righteous)와 ‘和’(Harmony)를 특별히 강조해 왔습니다. 義와 和는 함께 살고, 함께 번영하며, 함께 나아가는 공생, 공영, 공진의 세계를 위한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인류는 정의와 화합을 공동체 유지의 기본으로 여겨 왔습니다. ‘의로써 화를 이룬다(利者 義之和也)’는 말처럼 동양사상에는 義를 행하는 것이 화합의 기초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사야서(32장 17절)에도 ‘정의의 결과는 평화가 되고 정의의 성과는 평온이 되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둘은 정확히 같은 의미입니다.
세계 각국이 다른 나라와 義로써 관계를 맺고, 和를 추구해야 합니다. 신의와 신뢰가 충만한 가운데 조화를 이루고, 의로써 화를 이루어갈 때 인류는 훨씬 행복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조지프 나이(Joseph S. Nye) 교수님께서 “소프트 파워(soft power)가 21세기를 주도할 것”이라고 예견하신 말씀과 맥을 같이합니다. 실제로 지구촌에서 문화‧이념‧외교 등에 기초한 소프트 파워(soft power)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가고 있습니다.
특히, 소프트 파워는 정당성과 도덕성에 기반을 두는 권력입니다. 스스로 선하고 정의로운 국가, 주변국가와 화합하는 국가가 21세기 문명의 시대 지도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 국력에 더해 이처럼 인류에 대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나라가 ‘스마트 파워’(smart power)를 갖춘 21세기형 강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우리 공동체 내부의 義를 되살리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계경제의 급속한 발전은 ‘물질중심주의’ 확산이란 폐해를 낳았고, 그 결과로 나타난 ‘탐욕’과 ‘이기주의’가 기업과 국가, 인류 전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에게는 나눔과 배려, 포용 등 아름답고 정의로운 공동의 가치가 있습니다. 물질이 아니라 인간을 중시하고, 개인만이 아니라 타인과 공동체를 함께 생각하는 범세계적 가치회복 운동을 펼쳐나갈 때, 세계는 참다운 공생·공영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종전 이후 가장 역동적인 성장을 이룬 지역은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 지역입니다. 1950년에서 53년까지 한국전쟁 기간을 예외로 한다면 지난 70년 동안 동북아에는 평화와 안정이 지속되었고, 이는 동북아 각국이 누려온 번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발전이 균질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동북아 번영의 확산은 지역 내에 오랫동안 잠복해 있었던 불안정과 갈등의 요소들을 활성화시키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문명의 시대’에 맞지 않은 퇴행적 인식과 행동입니다. 명백한 역사적 사실조차 부인하면서 국제사회의 신뢰와 지지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신뢰는 義를 실천하고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비로소 구축될 수 있습니다.
모든 병은 깊어지면 치유가 불가능해지고, 갈수록 더 불행해집니다. 이웃국가들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정리할 것은 깨끗이 정리해야 합니다. 낡은 시대의 패권이 아니라, 선의의 경쟁과 협력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 바탕 위에서 서로 조화롭게 사는 화(和)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일본, 중국,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을 차례로 만나, 종전 70주년을 계기로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한반도 통일을 위한 관심과 협력을 촉구해 왔습니다. 대표적으로 동북아와 태평양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공동 결의안을 각국 의회가 함께 추진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지난 70년은 동북아와 태평양이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기간입니다. 비록 지금 많은 난관이 있지만 앞으로 30년간 각국의 지도자들이 함께 노력한다면, 저는 우리가 100년 평화의 기초를 쌓고 태평양을 말 그대로 거대한 ‘평화의 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의 석학과 전문가 여러분께서도 동북아의 화합과 신뢰,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대한민국 국회의 노력에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말아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석학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또 다른 핵심과제는 북핵 문제의 해결입니다. ‘핵을 가진 적대적인 북한’을 동북아 한 가운데 두고 평화와 번영의 지속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동안 한국과 국제사회는 북한의 핵개발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북핵 6자회담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2008년 말에 좌초해 버렸습니다. 일각에서는 6자회담 무용론까지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6자회담에 다시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핵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은 한반도 통일을 통해서 가능하지만, 북핵 폐기 과정의 시작과 진행에는 여전히 6자회담이 유효한 틀이기 때문입니다. 6자회담을 통해 북한을 제외한 5자가 북핵 문제 해결과정의 부담을 나눌 수 있고, 북한에는 체제유지에 대한 불안을 줄여줄 수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2008년 12월의 6자회담 좌초 당시로 돌아가야 합니다. 즉,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 모라토리엄’을 명확하게 선언하고 NPT 체제에 복귀하며, 나머지 당사국들은 그와 동시에 회담을 재개하는 데 합의하여 6자회담의 동력을 되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6자회담은 장기적으로 북핵 폐기의 토론장 이상의 역할도 기대됩니다. 6자회담이 순조롭게 진전될 경우, 별도의 프로세스를 통해 양자간 대화나 동북아 평화구조 정착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현재의 남북관계는 매우 경색되어 있습니다. 정부간 대화채널 복원이 힘든 상황이라면, 민간이든 국제기구든 다른 차원의 접근을 병행하여 우회로를 뚫어야 합니다. 저는 한국 국회가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뜻을 밝혀왔습니다.
우선, 남북 국회의장 회담 성사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금년 중에 남북 국회의장 회담이 성사된다면 꽉 막힌 남북관계의 물꼬가 트이고 한반도 문제 해결의 새로운 디딤돌이 마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북한정권과 북한주민을 분리해서 생각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독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은 북한 정권입니다. 현재 북한 어린이 여섯 명 중 한 명이 영양실조를 앓고 있고, 전체 인구의 1/4이 기초적인 의료지원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부디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 주시기 바랍니다. 식량, 의료 등 북한 취약계층을 위한 인도적 지원은 남북관계 상황에 무관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저의 확고한 신념입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의사 출신인 저는 종종 분단된 한반도를 반신불수 상태의 환자에 비유하곤 했고, 저의 소원은 반신불수가 된 한반도의 치유, 즉 통일이라고 말해왔습니다. 몸의 반을 쓸 수 없는 환자의 고통과 불편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상상해 보면, 분단 70년 동안 한국인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반도의 분단은 동북아 전체에도 큰 부담입니다. 북한이 군사적으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불량국가로, 경제적으로 지독하게 가난한 저개발 국가로 남아있는 한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은 모래성처럼 위태롭습니다.
통일의 길은 멀고 험하겠지만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남과 북은 비록 지난 70년간 떨어져 살았지만, 5천년 동안 만들어진 우리 민족의 동질성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분단의 시간은 우리 민족사에서 찰나의 일탈과 비정상의 시간에 불과합니다.
가까운 장래에 북핵문제 해결의 긍정적 단초가 마련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한국과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대북투자와 지원을 통한 북한의 경제재건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반도가 ‘사실상의 통일’을 향해 달리는 레일 위에 올라서는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남북간의 통일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소통하고 교류함으로써 신뢰를 쌓고, 그 신뢰의 토대 위에 남과 북의 주민들이 가슴을 열고 완전히 하나가 될 때 통일의 길은 완성될 것입니다.
여러분, 통일 대한민국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국은 5천년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범한 적이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통일한국 역시 전 세계 나라들과 신의로써 관계를 맺고 조화를 추구하는 “義로써 和를 이루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통일 대한민국은 비핵국가인 동시에 평화 애호국이며, 개방통상국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군사력이 아니라 매력 넘치는 ‘문화의 힘’을 자랑하는 문화강국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통일한국의 탄생은 동북아는 물론, 세계 평화의 증진과 인류사의 진보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경제통합 등 ‘사실상의 통일’ 단계를 지나 종국적인 통일단계에 들어선다면, 저는 우리 대한민국이 북한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남아공의 만델라식 용서와 화해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이 이질성을 극복하고 단일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에서,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용서하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한민족은 진정한 의미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각국의 석학과 내외 귀빈 여러분,
한국인의 건국이념은 홍익인간(弘益人間)입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말뜻 그대로,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이 소통하며 조화를 이루고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철학입니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 이념은, 놀랍게도 고대 그리스의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과 통하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대한민국이 인간내면의 아름다운 가치를 꽃피우는 홍익인간의 땅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무장한 통일한국은 적극적인 개발협력과 기여외교를 통해 인류공동체의 상생발전과 문화융성을 가장 선두에서 이끌어나갈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세계 각국에서 정계와 재계, 학계의 저명인사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각계를 대표하시는 현인들께서 지구촌의 주요 현안들에 대해 깊이 있는 토의를 해주시고, 세계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특히,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한 여러분의 깊은 관심과 지혜로운 조언을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