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 ||
당명 개정을 둘러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반대파 간의 숨막히는 1박2일간의 공방전이 그것이다.
박 대표의 선공-반대파의 반격-심야 정보전-새벽 대책회의-박 대표의 재공격-반대파의 재반격-박 대표의 사실상 패배로 이어진 전개과정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긴박하게 진행됐다. 이틀간 12시간 넘는 마라톤 연찬회의 최대 화두는 ‘당명 개정’이었다.
박 대표는 3일 연찬회 모두발언에서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이 대선을 치를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이름인지 생각해야 한다”며 “자꾸 (당명 개정) 시기를 재고 미루기보다는 당 선진화를 선포하고 이념 좌표를 새롭게 선정한 이번이 계기가 아닐까 생각한다”며 당명 개정 추진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박 대표는 “새로운 인물의 대거 영입, 다른 당과의 합당 등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쟁”이라며 “지난해 총선과 구례 연찬회에서 당명 개정을 약속했는데 안 하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해야 한다”고 기선잡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어진 토론에서는 “몸도 씻지 않고 옷만 갈아입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시기상조론’을 들어 당명 개정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주류를 이뤘다.
소장파인 정병국 의원은 “근본적인 변화 없는 당명 개정에 반대한다”고 했고, 이성권 의원도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박 대표 지지그룹인 보수파의 김용갑 이방호 의원마저 “현재의 조직과 인원을 갖고 이름을 바꾸는 것은 안된다. 새로운 피를 수혈하거나 새로운 당을 만들어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때 당명을 바꿔야 한다”고 가세했다. 박진 임태희 의원 등 중도파들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반대했다.
여기에 전재희 고진화 의원의 박 대표 ‘백의종군’이나 ‘2선 퇴진론’까지 더해지면서 당명 개정은 사실상 물 건너 가는 분위기였다. 안상수 의원은 “지도부는 사퇴하고, 4월 전당대회를 열어 당명도 바꾸고, 당이념에 대한 평가도 받자”며 조기전대론까지 제기했다.
밤 12시가 넘어 토론이 끝나자, 이 때부터 바빠지기 시작한 사람은 유승민 대표비서실장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반대파의 반발이 거센 만큼 대책 마련이 시급했던 것이다. 그는 김덕룡 원내대표, 김무성 사무총장, 박세일 정책위의장 등 주요당직자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다음날 새벽 대책회의 개최를 통보하는 등 ‘작전’에 돌입했다.
그는 “칼을 뽑은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내일 오전 회의에서 표결을 해서라도 끝장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 측근 의원들은 다른 의원들과 심야 술자리를 가지며 동향 파악 및 표 단속에 들어갔다.
4일 새벽 조찬을 겸한 당 지도부 회의는 은밀히 진행됐다. 박 대표 최측근인 전여옥 대변인에게도 사전에 통보되지 않았다.
이날 2차 토론회에서도 당명 개정을 둘러싼 논쟁이 해법을 찾지 못하고 가열되자, 마침내 박 대표가 단상에 올랐다.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당이 나를 의식하지 말고 당당하게 임해주었으면 한다”고 말문을 연 박 대표는 “당권과 대권을 분리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며 반대파들이 제기한 당 대표와 대선후보 분리 주장을 수용했다. 박 대표는 이어 “지난해 국가보안법 논란 와중에 열린우리당이 나를 보고 ‘공포의 수첩’을 갖고 다닌다며 비판했는데, 제가 실수한 것 같아요. 기왕이면 노트북을 가지고 다녀서 (여당에서) 공포의 노트북이라고 했으면 디지털 정당을 표방하는 한나라당의 이미지가 좋았을 텐데…”라며 ‘농’하는 여유도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 대표가 당명 개정 추진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냐는 시각이 우세했다.
그러나 박 대표의 승부수는 마지막에 나왔다. 박 대표는 “국민에게 약속한 대로 당명 개정에 대한 결론을 내야 한다”며 “당명 개정을 5월 말까지 매듭지을지 말지를 표결로 결정하자”고 숨겨뒀던 히든카드를 꺼냈다. 토론장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반대파들의 발언 요청이 쇄도했다.
이성권 의원은 “박 대표가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명 개정을 밀어붙이는 것은 오기 정치”라고 비판했고, 김문수 의원은 “당명 개정은 당헌 당규상에 따라야 하는 만큼 전당대회를 열어야 한다”며 반대했다. “표결을 해서 51 대 49로 판결이 난다 해도 남는 것은 당의 분열인 만큼 표결은 피해야 한다”는 김기춘 의원의 중재안이 나올 때까지 10여 명의 의원이 잇달아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토론장은 난장으로 변했고, 박 대표와 지도부는 정회를 요청하고 토론장을 나와 대책을 숙의했다. 이 자리에서도 박 대표는 “당명 개정을 하든 안하든 이번에는 끝장을 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덕룡 원내대표 등은 “박 대표가 당명 개정 혁신위 위원장을 맡아 일을 추진하되, 오늘은 표결하지 말자”며 박 대표를 설득했다.
다시 단상에 오른 박 대표는 “국민과의 약속대로 이번에는 결론을 냈으면 좋겠다는 제 개인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모두 표결에 부담을 느끼시니 안 하는 것으로 하겠다”며 당명 개정 카드를 접었다. 이틀에 걸쳐 숨가빴던 공방전이 패배로 확인되는 순간 박 대표의 표정은 굳어갔고, 불쾌감마저 묻어났다.
박 대표 한 측근은 “이명박 서울시장과 손학규 경기지사와 연관된 일부 의원들이 당 개혁의 핵심인 당명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며 반대파들의 불순한 의도를 비판했다.
당명 개정 실패는 박 대표에게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여권의 과거사 공세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당명 개정 불발이라는 박 대표의 리더십 위기는 한나라당 세력 판도를 ‘친 박근혜 대 반 박근혜’ 대립구도로 재편되는 계기로 작용할 뿐 아니라 자칫 박 대표의 조기 낙마론의 불씨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 대표측이 “끝장을 보지 않고 타협의 유연한 리더십을 보인 것은 성과”라고 애써 자위하면서 후폭풍을 경계하는 모습은 이 같은 우려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유영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