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 | ||
하지만 그 시기와 배경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들도 많다. 노무현 대통령이 올해는 경제에 올인 하겠다고 선언한 마당에 여권이 소모적인 개헌 논쟁으로 허송세월을 보낸다면 경제 회생은 또 뒷전으로 나앉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지난 몇 십 년 간의 경험을 통해서 보면 개헌론의 지각변동이 있은 뒤에는 항상 정계개편이라는 ‘해일’이 뒤따라오기 마련이었다. 현 정치권에도 여권이 집권 3년차를 맞아 과반수 붕괴 위기와 지지도 하락 등의 악재에 밀려 정계개편을 할 것이라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이는 최근의 민주당 의원 영입 논란과 개헌론 논의를 통해 그 가능성이 입증되고 있다.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서 전격적으로 단행되었던 대표적인 정계개편 사례를 통해 앞으로 일어날 여권의 정계개편 단초를 미리 들여다봤다.
한국 정치의 정계개편은 대체적으로 5년 주기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정계개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충격적이었던 3당 합당은 지난 90년에 단행되었다. 그 뒤 95년에는 김종필씨가 민주자유당을 박차고 나와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면서 정치지형이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2000년에는 당시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와 민주당의 합당으로 새천년민주당이 만들어지는 지각변동이 일어난 바 있다. 이런 5년 주기설을 토대로 보면 올해 2005년에도 정계개편의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계개편이라는 ‘화학적 반응’은 어떤 요소에 의해 만들어질까. 먼저 정계개편은 대부분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여당에 의해 일어나게 된다. 힘이 없는 야당으로서는 밀려오는 ‘해일’을 피할 수 없이 여당의 정계개편 구도 속으로 빨려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집권 여당은 대부분 국정 장악력이 약해져 가는 과정에서 국면전환을 시도하기 위해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시도한다. 이는 5년 단임 대통령제 한국 정치의 독특한 ‘관습’인 집권 3년차 증후군과도 연결된다. 집권 3년차가 되면 대개 임기 내 치적을 의식하면서 분위기 전환을 꾀했던 것이다.
지난 87년 12월 집권한 노태우 정권은 88년 4·26 총선에서 대패하며 여소야대의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이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여권의 구상이 바로 보수대연합이었다. 당시 박준규 대표는 민정-공화당의 순수한 보수연합을 주창했지만 좌절됐다. 그리고 이종찬 민정당 사무총장은 민정·평민의 제휴를 주장해 관심을 모았다. 그는 정치안정과 지역당 체제 타파 등의 명분을 내걸고 의욕적으로 정계개편을 추진했지만 민정당 내의 DJ에 대한 혐오세력에 의해 결국 외면당하고 만다.
정당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K박사는 “노태우 정권의 3당 합당 정계개편은 오로지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 이질적인 집단을 억지로 한데 묶는 권력 야합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런 점에서 3당 합당은, 헌정 파괴를 가져온 5·16과 정권 연장을 위해 새로운 권력을 창출했던 유신헌법과 함께 3대 정계개편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김영삼 정권은 초창기만 해도 실명제 실시와 공직자 재산공개 등의 개혁정책으로 90%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지지도를 기록했다. 하지만 집권 2년차에 접어들면서 쌀시장 개방 파동 등이 이어지면서 대통령 지지도가 한번도 60%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김영삼 정권은 떨어진 지지도를 만회하고 민자당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파벌’을 정리하기 위해 김종필 대표 축출 작전을 기획한다. YS의 ‘복심’을 읽은 JP는 민자당을 전격 탈당한 뒤 충청권을 발판으로 삼은 지역주의 정당 자유민주연합을 95년 2월에 창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씨 비자금 사건을 터뜨려 정국이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여권이 노씨의 비자금 내용을 흘려 인위적으로 정계개편을 유도했다는 주장도 제기됐었다. 노씨 비자금 사건을 계기로 구 여권과의 단절을 시도한 여권은 96년 총선을 앞두고 12월 신한국당을 창당해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가속화한다.
▲ 개헌론이 급물살을 타면서 정계개편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지난 90년 3당 합당 당시의 3당 대표들. | ||
김대중 정권에서도 크게 두 번의 정계개편이 이루어졌다. 먼저 정권 창출을 위한 DJP 연합을 들 수 있다. 김대중 김종필 ‘양김’은 97년 8월 ‘99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료한다’는 등의 약속을 하며 DJP 공조를 성사시켰다. 이를 계기로 DJ는 필생의 꿈인 정권 창출을, JP도 권력 지분을 양도받으며 정치생명 연장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국민대통합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민주세력과 유신세력의 권력 야합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DJ 정권은 집권 2년차에 ‘옷 로비’ 파동으로 생채기를 입은 뒤 그 다음해에는 의약분업의 정책 실패로 지지도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대해 DJ는 떨어진 국정 장악력을 높이고 2000년 총선을 대비해 정계개편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여권은 크게 다섯 가지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었다.
DJ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합당에 관심이 있었다. 문희상 정무수석과 이강래 의원 등은 PK와의 민주대연합을 추진했다. 하지만 김중권 비서실장은 TK와의 지역연합을 주장했다. 제2 야당과의 제휴 또는 중부권과의 지역연합, 아니면 재야세력과의 개혁연대 등도 시나리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인위적인 정계개편은 모두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DJ는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와 민주당을 합쳐 새천년민주당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2000년 4월13일 치러진 16대 총선에서 여당인 민주당은 1백15석을 얻는 데 그쳐 여소야대 정국이 조성됐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공동정권의 한 축을 이뤘던 자민련이 16대 총선에서 17석짜리 미니정당으로 축소됨에 따라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어주기 위해 의정 사상 초유의 ‘의원 꿔주기’라는 웃지 못할 정계개편이 이루어진다. 이는 DJ의 아이디어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정계개편 사례들을 토대로 노무현 정권의 정계개편 시나리오도 예상해볼 수 있다. 노 정권은 현재 지지도 30%대에 허덕이고 있고 지금까지 이렇다 하게 내세울 만한 정책적 성공이 없는 상태에서 국면전환을 위한 정계개편을 전격 단행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선거법 위반으로 과반수가 무너질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정계개편은 더욱 매력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여권은 민주당과의 합당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교육부총리 인선을 두고 민주당 의원들을 ‘빼내려다’ 실패한 것이 이를 간접 증명하고 있다. 당장 실현될 카드는 아니지만 내년 지방선거와 2007년 대선을 위한 필승카드임에는 틀림없다. 현재 여권이 개헌론의 애드벌룬을 띄우는 것도 정계개편을 위한 전주곡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향후 정치권에 정계개편 회오리가 분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구태의연하고 정략적인 방법보다는 이념을 매개로 한 지각변동일 가능성이 크다. 1인 보스 체제가 사라지면서 이념과 정책에 따른 이합집산을 거듭할 것이기 때문.
정치학을 연구한 K박사는 이에 대해 “지금까지 한국 정치는 보스 중심에 의해 정계개편이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17대 총선을 거치면서 이런 시스템에 변화가 많이 왔고 진성당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톱-다운식의 정략적인 정계개편은 아래로부터 거센 저항을 불러올 것이다. 그럴 경우 이념이나 정책에 의한 정계개편이 자연스런 현상으로 자리잡을 것이고 이것은 곧 민주주의 성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념에 의한 정계개편이 일어난다면, 먼저 열린우리당의 분열을 점쳐볼 수 있다. 이념적 스펙트럼이 그 어느 여당보다 넓은 열린우리당으로서는 앞으로 개혁당 중심의 진보그룹이나 안개모 중심의 보수그룹들이 떨어져 나가고 나머지는 남아서 민주당과 합당해 대선을 치르는 구도를 상정해볼 수 있다.
이런 이념적 분화는 한나라당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고진화 의원 등 진보적 의원들이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있고 보수세력은 자민련 등과의 협력을 모색할 것이고 중도보수도 뉴라이트 등과 새로운 대안을 만들 수 있다. 이럴 경우 한나라당도 분당 사태로 치달을 것이다.
이밖에 한나라당 중심의 범 보수 연합이 탄생하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현재 이방호 의원 등이 민주당과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열린우리당 진보세력을 제외한 어떤 정파와도 연대를 해야 재집권할 수 있다는 전략이다. 여기에 충청권 신당, 극우 신당의 출현도 예상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