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1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맨 앞)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요즘 관가에서는 ‘장관들은 각종 공식 석상에서 꿀 먹은 벙어리들이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소신 있는 발언을 하지 못하다보니 기자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높다. 구조개혁은 모두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입에서 나온다. 부동산 대책, 노동시장 개혁, 심지어 교육·복지까지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영역까지 기재부가 모두 간섭한다.
이는 역대 정부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도 이 정도로 장관들의 힘이 약하지는 않았다. 이명박 정부의 서규용 전 농림부 장관은 ‘돌직구 장관’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청와대나 기재부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거침없이 밝혀 주목을 받았다. 강만수·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 역시 돌직구의 대명사다. 최경환 부총리도 이명박 정부에서 지식경제부 장관으로 활동할 때 기자들의 이슈 메이커였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에서는 ‘소신 있는 장관’들이 실종됐다. 현오석 전 경제부총리는 퇴임하면서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며 재야에 묻혔다. 2013년 세법개정안은 중산층 세금과표 구간이 확대되면서 불만이 높아지자 발표된 지 일주일 만에 전면 수정하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현 정부의 장관들이 얼마나 소심한지 제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장관들이 힘을 쓰지 못하면서 경제부처 직원들은 아예 기재부를 상급 기관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정부세종청사에 입주한 경제부처의 경우 기획재정부는 산하에 국토교통과(국토교통부), 환경정책과(환경부), 고용노동과(고용부) 등을 두면서 다른 부처를 틀어쥐고 있다. 그만큼 각 부처가 제대로 된 정책을 펴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국토교통부는 부동산 대책을 아예 기재부로 이관한 모양새다. 지난 2년간 내놓은 정부 부동산대책은 기획재정부 브리핑실에서 나왔다. 주무부처인 국토부가 모르는 내용도 상당수 포함됐다. 최경환 부총리는 “한여름에 겨울 코트를 입고 있는 격”이라고 취임 전부터 부동산 시장에 대한 강한 발언을 내뱉었다.
정부는 지난해 2·26 주택임대차시장 선진화 방안, 7·24 경제정책 방향, 9·1부동산 대책 등 모두 3차례 부동산 관련 대책을 내놨다. 3차례 모두 공식적인 브리핑과 대책 발표는 기재부가 중심이 됐다.
환경부는 ‘경제살리기’의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환경부 역점 사업인 자동차 출고시 세금을 물리는 ‘저탄소차협력금제도’는 경제논리에 막혀 2020년 이후로 밀렸다. 사실상 제도가 시행될 가능성이 희박해진 것이다. 저탄소차협력금제도에 제동을 건 곳 역시 기재부다. 엄밀히 말하면 최경환 부총리의 판단이다.
윤성규 환경부 장관은 사실상 백기 투항했다. 저항 한번 못하고 기재부의 입장을 수용했다. 대신 3년차 장관 유임에 성공했다. 일각에서는 ‘말 잘 듣는 장관이 장수한다’는 냉소를 보냈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올해 최대 수난시대를 맞고 있다. 노동개혁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자 ‘개각 대상 1호’로 부상했다. 다만 현재 박근혜 정부의 인력풀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단일 개각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이다.
이 장관은 노동개혁에서 부처의 힘을 발휘하는 데 실패했다. 이미 최경환 부총리가 지난해 11월부터 노동개혁을 강조하면서 주도권을 빼앗겼다. 이 장관이 나서서 해야 할 일을 기재부에 빼앗기자 고용부는 일거리가 줄었다. 기재부에서 지시하고 요청하는 사안만 넘겨주는 하위 부서로 전락했다.
고용부에서는 당연히 불만이 터져 나왔다. 노사정위원회가 평행선을 달리는 것도 이 장관이 조율에 미숙했다는 평가다. 반면 최 부총리는 연일 노동시장을 강하게 압박했다. 재계 임금인상, 임금피크제 등 민감한 사안도 기재부가 주도했다.
산업부의 통상 업무는 기재부로 넘어간 지 오래됐다. 기재부가 부총리로 격상되고부터 산업부 역할은 기재부를 보좌해주는 자문단으로 전락했다. 향후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도 기재부의 결정 없이 산업부가 소신 있는 행보를 하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부세종청사 한 입주부처 관계자는 “기재부 ‘갑질’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독선적이지는 않았다”며 “기재부가 부총리로 승격되면서 장관들의 입김이 줄었다. 부총리가 장관들보다 윗선이라는 인식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협업이 잘 될 수 있겠나”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또한 “박근혜 정부 들어 핵심 정책은 국무회의에서 발표되고 있다. 해당 부처는 백브리핑 정도다. 여론도 이미 기재부가 한 얘기를 부처에서 재탕한다는 시선이다”라며 “부처와 협의 없이 일방통행하는 기재부의 독선이 있는 한 경제정책이 올바르게 갈지 걱정이 앞선다”고 덧붙였다.
유민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