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민주연합의 4·29 재보선 참패로 ‘문재인 대세론’이 흔들리자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손학규 전 대표(왼쪽부터) 등 차기 주자 3인방이 주목받고 있다. 일요신문 DB
지난 2월 취임한 문재인 대표는 우군인 친노 진영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중도를 아우르는 행보를 보이며 차기 주자로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문 대표는 재·보궐 선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각종 차기 대선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여야 통틀어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4·29 재·보궐 참패로 ‘문재인 대세론’은 치명상을 입게 됐다. 텃밭인 호남에서 패하며 리더십에 심각한 흠집이 났을 뿐 아니라 그동안 문 대표 강점으로 꼽혔던 영남에서의 지지율 역시 김무성 대표가 급부상하면서 주춤한 모습이다. 차기 주자로서의 문 대표 경쟁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대두된 것이다.
누군가의 위기는 누군가에겐 기회가 되는 법. 정치권에선 독주체제를 굳히는 듯했던 문 대표 뒤를 쫓을 차기 주자 3인에 주목하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문 대표를 겨냥한 2인자들의 본격적인 추격전이 펼쳐질 것으로 내다보는 것이다. 이들 중 박원순 서울시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잠룡 황제주’다. 야권 차기 지지율 조사에서 언제나 문 대표 뒤를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는 박 시장은 아직 공식 입장을 밝히진 않았지만 출사표를 던질 시기만 남아 있다는 게 중론이다. 박 시장의 한 측근 인사는 “현직 시장으로서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박 시장으로선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지 않느냐”면서도 “(출마하는 건) 확실하다고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박 시장 최대 장점은 대선보다 더 어렵다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두 차례 이겼다는 것이다. 박 시장 주변에서 “우리에겐 ‘승리 DNA’가 있다”는 자신감이 흘러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거 과정에서 전국적인 인지도는 ‘덤’으로 얻었다. 박 시장이 경남 출신(창녕)에 최대 표밭 서울의 시장으로서 비교적 안정적인 지지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향후 표 확장성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관측이다. 정치 전문가들 중에선 박 시장의 검증된 토론 능력에 높은 점수를 주기도 한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토론 노하우를 쌓았다. 차기 주자들 중 가장 앞서 있다는 평이다. TV 토론 중요성을 감안할 때 박 시장에겐 엄청난 이점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시장 아킬레스건은 당내 세력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대선에 나가기 위한 예선 통과 자체가 힘들 수 있다는 얘기다. 2012년 대선 당시 안철수 후보가 ‘신드롬’에 가까운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야권 주류 친노가 밀었던 문재인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던 것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간다. 박 시장 측이 최근 정치권 동향을 파악하는 대관 업무 기능을 강화하는 등 내년 총선을 대비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이 연장선상에서 풀이된다. 앞서의 박 시장 측근은 “원외인 박 시장으로선 원내에서 자신을 ‘엄호’해줄 의원들이 필요하다. 대권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당내 지분을 확대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모아진 상태”라고 털어놨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최근 문 대표 위기는 박 시장 ‘몸값’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당내 세력이 거의 없다는 것은 어느 계파와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곧 박 시장이 친노 와 비노 그 누구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 시장이 현 지지율을 유지한다면 ‘골라서’ 갈 수 있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길을 택하든 박 시장으로선 친노 안희정 지사, 비노 손학규 전 대표와의 정치적 셈법을 고민해야 한다. 대권 삼국지가 정치판에 현실로 펼쳐질 경우 박 시장 머릿속이 가장 복잡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그동안 ‘우량주’로 분류돼왔다. 잠재력은 충분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견해가 주를 이뤘다. 안 지사는 차기 대선 주자 지지율 조사에선 5~6위권을, 차기 리더 부문에선 대부분 야권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는 대통령 감으로선 시기상조임을 나타내는 결과다. 한 친노 의원은 “안 지사는 우리의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다. 조기 등판했다가 자칫 잃으면 안 되는 카드다. 한때 우리가 기대를 모았던 김두관 전 지사 전철을 밟게 할 수는 없다. 조금 더 역량을 쌓을 수 있도록 우리가 기다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차기보다는 차차기를 대비해 아껴둬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에 대해 안 지사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아직 부족하다. 경험을 쌓아 확고한 대안을 준비할 수 있다면 도전해보겠다”는 원론적 입장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상태다.
신선한 이미지에 광역단체장 재선이라는 정치적 스펙으로 ‘잠룡’ 반열에 오른 안 지사가 최근 급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성완종 리스트’가 터진 후부터다. 이완구 전 총리, 반기문 UN 사무총장 등 충청 대망론을 꿈꾸던 인사들이 줄줄이 불똥을 맞으면서 안 지사가 충청권의 유일무이한 차기 주자로 거론되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막론하고 충청 맹주를 물어보는 질문에 주저 없이 안 지사를 꼽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안 지사 측근은 “일시적인 현상 아니겠느냐”면서도 “충청권에서 대통령이 나오길 바라는 여론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안 지사에게 기대를 거는 유권자들이 많다는 증거로 생각한다. 야권으로선 충청을 기반으로 하는 안 지사 카드를 쉽게 외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안 지사는 ‘양날의 검’을 가지고 있다. 바로 ‘친노’라는 점이다. 안 지사가 새정치연합 최대 계파인 친노 적자라는 것은 언뜻 보면 긍정적인 요소가 더 많다. 문 대표 대안으로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 ‘영순위’는 바로 안 지사다. 올해 초부터 친노 진영에선 ‘당권 문재인, 대권 안희정’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로 안 지사 존재감은 문 대표 못지않다. 친노가 ‘안희정 카드’로 결론을 내릴 경우 안 지사 본선 진출 가능성은 박 지사나 손 전 대표보다 훨씬 높다. 예선 통과를 고민해야 하는 나머지 둘보다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 상황은 안 지사에게 그리 녹록하진 않아 보인다. 재·보궐 참패 후 친노 진영 전체가 야권에서 거센 비난에 직면해있는 까닭에서다. 안 지사로선 친노라는 꼬리표가 오히려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직계 선배인 문 대표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의문부호가 달린다. 안 지사 측근 역시 “문 대표가 ‘고’할 경우 안 지사로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또 일각에선 안 지사의 낮은 인지도를 지적하기도 한다. 충청을 벗어날 경우 과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박 지사와 손 전 대표의 경우 이름값에 있어서만큼은 안 지사를 압도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지난해 7·30 재보선 패배 후 은퇴를 선언한 뒤 칩거에 들어간 손학규 전 대표는 굳이 주식으로 분류하자면 ‘비상장 황제주’다. 상장만 하면, 언제든 정치판을 뒤흔들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정치권에선 ‘새누리당이 가장 무서워하는 야권 후보’라는 말까지 들린다. 은퇴 후 언론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손 전 대표는 재보궐 참패 이후 비노 진영을 이끌 수장으로 거론되면서 다시 상한가를 치고 있다. 문병호 새정치연합 의원은 “손 전 대표가 정계 복귀를 하는 것은 당으로서 환영할 만한 일”이라며 ‘러브콜’을 보냈고, 정세균 상임고문도 “손 전 대표가 도울 일이 있으면 그럴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냈다. 원내대표 선거를 앞두고는 각 후보들이 손 전 대표에게 ‘SOS’를 보내기도 했다.
손 전 대표 행보 역시 ‘컴백’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낳기에 충분했다. 손 전 대표는 4월경부터 부쩍 자주 서울을 찾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측근 결혼식과 장례식 참석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재·보궐 및 원내대표 선거 등과 맞물리며 정치적 해석이 나왔던 것이다. 윤호석 정치평론가 역시 “손 전 대표 정도가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비춰질지 예상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재기를 위한 것이라고 하기엔 다소 섣부른 판단일 수 있겠지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설왕설래가 오가자 손 전 대표는 지인들에게 “정계 복귀는 절대 없을 것”이라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전해진다.
복수의 손 전 대표 측근들 역시 “손 전 대표 스타일상 복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고개를 젓고 있다. 한 측근은 “(정치권 컴백은) 손 전 대표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정치를 하는 분이 아니다. 한 번 내뱉은 말을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설령 복귀를 위한 최적의 조건이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손 전 대표가 은퇴를 번복하진 않을 것이란 게 측근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손학규계’가 사실상 와해 직전까지 간 현실에서 손 전 대표가 돌아오더라도 파괴력이 있을지 회의적인 시선도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손학규 카드’는 유효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복귀 수순을 손 전 대표에 대입시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손 전 대표의 또 다른 측근 역시 “손 전 대표 컴백을 위한 대의명분만 만들어지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지금 야권의 유력 인사들이 여러 채널로 ‘도와 달라’고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손 전 대표가 끝까지 모른 체할지 모르겠다. 자신은 욕을 먹더라도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다시 여의도에 몸을 던질 수 있는 게 바로 손 전 대표”라고 말했다. ‘대권 신 삼국지’의 마지막 축은 손 전 대표 ‘결심’에 의해 완성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