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정도시법이 통과되기 하루 전인 지난 1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이재오 의원 등 결사반대파 의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
그러나 이는 박근혜 대표 등 당 지도부와 행정도시법 반대파간의 일시적 휴전이며, 사활을 건 전면전에 대비하기 위한 양측간의 숨고르기에 불과한 미봉책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행정도시법 무효화를 선언하며 투쟁위를 구성한 반대파들은 김덕룡 원내대표가 사퇴한 마당에 박 대표를 더 흔들어 댈 경우 쏟아질 역비판을 일시적으로 모면하기 위해 유화책을 택했고, 박 대표 역시 흔들리는 리더십을 더 방치할 수 없어 반대파와 어설픈 악수를 했다는 분석이다.
행정도시법에 대한 원만한 해법을 찾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데다 특히 2007년 차기 대권 후보를 둘러싼 정치적 입장이 다른 그룹들이 사사건건 마찰을 빚어온 한나라당이 정권 창출을 위해서는 아직도 배가 고프며 더 많은 희생양을 요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이번 내홍이 행정도시법으로 야기됐지만, 그 이면에는 대화와 타협을 우선시하며 유연한 대여관계를 유지해온 박 대표와 김 전 원내대표의 상생리더십에 대한 선명야당파들의 누적된 불만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당 정체성을 둘러싼 이념 투쟁의 성격이 강하다.
반대파 이끌고 있는 김문수 이재오 홍준표 의원 등 비주류 3인방과 이들에게 동조하는 이방호 김용갑 의원 등 영남보수파 의원들은 비타협적인 원칙론을 내세우며 강력한 야당론을 주장해 왔다.
이에 따라 당내 여러 정파들이 행정도시법과 차기 대권 구도, 야당의 정체성 등에 대한 정치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당이 핵분열될 것이라는 전망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남경필 전 원내수석부대표는 “이번 파문이 당 쇄신의 에너지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의원들은 제 갈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당장 당 지도부와 투쟁위 반대파 의원들은 당 수습책을 놓고 티격태격하고 있다. 이재오 홍준표 김문수 의원 등 강경파들은 박 대표를 제외한 당직자 총사퇴를 요구하며 제로 베이스에서 출발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번 기회에 박 대표의 손발을 아예 잘라 버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대표는 이 같은 주장을 일축하고, 11일 원내대표 선출을 위한 의원총회를 소집해 놓았다. 김 전 원내대표 사퇴 이상의 후퇴는 없다고 분명히 못을 박은 것이다.
유승민 대표비서실장은 “박 대표는 당직자를 모두 사퇴시키느니 차라리 대표직을 던져버릴 것”이라며 “반대파들이 수용하지 못할 요구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반대파들이 지금은 박 대표를 직접 겨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4월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과거법 등 쟁점법안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고, 4월 재보궐 공천문제가 불거지면 다시 대대적인 흔들기에 나설 것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당을 팔아먹었다”라든지, “사쿠라”라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반대파들이 지금은 발톱을 숨기고 있지만 때가 되면 다시 날카로운 발톱을 곧추세우고 대들 것이라는 뜻이다.
이재오 의원 등 강경 반대파들이 김 전 원내대표의 사퇴를 `아름다운 퇴진’이라고 평가한 것도 알고 보면 비토그룹에게 접근하려는 고도의 술책이라는 것이다. 강경파들은 우선 원내 대표직을 차지해 원내를 장악한 뒤 당권에 도전할 것이라는 게 당 지도부의 판단이다. 이재오 의원은 당권에, 홍준표 의원은 차기 서울시장에 관심이 있고, 김문수 의원은 원내대표나 차기 경기지사를 생각하고 있다. 이재오 홍준표 의원은 당내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인 이명박 서울시장과 가깝다.
표결을 통해 찬성한 행정도시법안에 대해 반대파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것을 보고 힘없는 대표로서의 무력감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전의 계보정치는 아니지만 지금처럼 느슨하게 의원들을 관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박 대표는 12개 행정부처를 이전하는 행정도시법과 관련, “수도분할이 아니라 과천청사 이전”이라고 규정했다. 수도분할이라는 반대파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으로, 결기마저 느껴진다.
또 당 혁신위에서 논의중인 `당권과 대권 분리’에 대해서도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에는 당 혁신안이 마련되며 대권도전을 위해 당 대표를 포기하고 조기 전당대회를 열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지금은 입장이 백팔십도 바뀐 것으로 전해졌다. 당권, 대권 분리는 올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임기가 끝나는 2006년 7월부터 적용한다는 것이다. 대권 출마를 선언한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무슨 당권, 대권 분리냐는 논리다.
박 대표측은 “당이 혼란스러우면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대표직을 던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 착각”이라며 “그럴수록 대표직에 더욱 집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불신임 서명운동이 일어나 의원 과반수 이상이 퇴진을 요구하거나 스스로 이만하면 됐다고 판단하지 않은 이상 중도 사퇴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강 대 강’전략으로 맞대응하겠다는 셈법이다.
박 대표가 올해 조기 사퇴할 경우 경쟁자인 이명박 서울시장이나 손학규 경기지사의 단체장 임기가 끝나는 내년 6월까지 당을 이끌 만한 마땅한 리더가 없는 것도 박 대표의 논법에 힘을 실어주는 요인이다. 이 시장과 손 지사가 최근 박 대표 중심으로 당이 단합돼야 한다고 밝힌 것도 이 같은 상황과 무관치 않은 대목이다.
하지만 이번 갈등을 촉발한 행정도시법에 대한 범국민적인 저항운동이 일어날 때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행정도시법 반대파 거두인 이 시장과 찬성파인 박 대표와 손 지사가 갈등의 최일선에 나서 진검승부를 펼쳐야 하는 상황이 조기에 초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승부의 결과에 따라, 혹은 그 과정에서 당이 분당되거나 또는 일부가 탈당하는 사태가 불가피하게 벌어질 수 있다는 게 분당론의 근거다.
소장파 한 의원은 “지난 90년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 통일민주당이 정권창출을 위해 3당 합당이라는 야합으로 탄생한 민자당에 뿌리를 둔 한나라당은 그간 정치적 지향과 가치, 철학에서 융합하지 못하고 충돌을 거듭해 왔다”며 “이젠 치열한 갈등의 용광로에 모든 것을 집어 넣고 새롭게 탄생하든지, 아니면 각자의 길을 가든지 양자택일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유영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