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열린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후보자 선출을 위한 예비선거에서 당선된 8명의 후보들. 왼쪽부터 송영길, 김두관, 유시민, 김원웅, 문희상, 염동연, 장영달, 한명숙 후보. | ||
전대 자체가 권력재편의 계기이긴 하나 예비경선(3월10일)을 전후해 기존의 계파간 역학구도에 비춰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발하면서다. `개혁 대(對) 실용’이란 기본 대립구도가 바뀐 것은 아니지만, 당권의 향배는 물론 향후 여권의 정국 운영, 나아가 대권경쟁 구도까지 내다 볼 수 있는 ‘의미있는’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는 평가다.
경선과정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물은 당권도전에 나선 8명 후보가 아니라 뜻밖에도 ‘관전자’ 입장인 정동영 통일·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이번 당권레이스가 ‘정·김 대리전’이 되리란 전망은 진작부터 나온 터지만, 실제 경선이 진행되면서 예상보다 정도가 훨씬 더하다는 분석이다.
두 사람 중 우선 일찌감치 친노그룹 ‘좌장’인 문희상 의원을 당 의장으로 밀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던 정 장관은 현재까진 꽤나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다. 여권 내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로, 이번 전대를 친노그룹과의 ‘전략적 연대’의 공간으로 설정했던 정 장관으로선 문 의원이 확실한 강세를 보이고 있는 만큼 느긋한 입장이다. 정 장관은 앞서 1월 중순엔 명계남씨 등 노사모 핵심인사들을 주축으로 발족한 국민참여연대에 상당수 계보 의원들을 가입시키는 등 친노그룹 ‘우군화’(友軍化)에 각별한 공을 들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정 장관의 만족도는 비단 ‘문희상 대세론’을 거들었다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라, 판도 자체를 뒤흔든 데서 당 안팎의 평가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른바 ‘정심’(鄭心) 논란이다. 이와 관련해 가장 많이 거론되는 사안은 신기남 의원의 예비경선 탈락이다.
정 장관과 신 의원은 김대중 정권 시절 민주당 ‘정풍운동’에서 부터 열린우리당 창당에 이르기까지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온 사이. 둘과 천정배 전 원내대표를 묶은 ‘천·신·정’이란 조어는 얼마전 까지만 해도 ‘여권 핵심부’란 말과 동의어였고, 실제 2004년 1월 전대에서 당 의장에서 선출된 정 의장은 4·15총선 직후 의장직을 신 의원에 넘겨줬다.
하지만 두 사람간 ‘우애’는 정 장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 의원이 당권도전에 나서면서 틀어지기 시작하더니, 정 장관측의 ‘저격’으로 신 의원이 예비경선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사실상 파탄나 버렸다는 평가다. 경선 당일까지 예선탈락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신 의원측은 정 장관측의 ‘막판 공작’이 핵심 패인이었다고 울분을 터뜨리면서다.
당내에선 신 의원측 주장이 여러 정황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이 많다. 정 장관측의 경선전략이 어차피 계파 독자 후보에 대한 ‘올인’이 아닌 실용성향 후보들에 대한 ‘포트폴리오’였던 만큼 개혁노선을 전면에 내세웠던 신 의원에 대한 조직적 지원은 애초부터 배제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부에선 정 장관이 이번 기회에 ‘작심하고’ 신 의원과의 관계 단절에 나섰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구 당권파의 한 의원은 “4·15총선 이후 1년 가까이 당과 거리를 둬 왔던 정 장관 입장에선 차기 지도부가 어떻게 구성되느냐는 대권전략상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조만간 당에 복귀해야 할 처지에서 정 장관과 대척점에 서 있는 재야파와 개혁당 그룹이 지도부를 장악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재야파와 연대해 ‘개혁 패키지’를 추진했던 신 의원의 행보는 정 장관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정 장관이 ‘매몰차다’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신 의원에 등을 돌리고 대신 막판에 자신과 같은 실용성향에다 호남 출신인 염동연·송영길 의원에 표를 몰아줘 예선탈락의 위기에서 구했던 것은 이같은 이유에서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이어 “열린우리당에 ‘천·신·정’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 장관은 당에 복귀하는 대로 당내 실용성향 의원들을 상대로 ‘세 확산’을 추진해 ‘정동영계’를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2006년 지방선거를 전후해 ‘정동영 대세론’에 불을 지핀다는 구상인 것으로 안다. 쉽게 말해 이번 경선에서 나타난 정 장관의 행보는 100% 대권전략에 따른 프로세스란 얘기다”고 덧붙였다.
정 장관이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반면 라이벌인 김 복지부 장관은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국민정치연구회가 응집력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국정연이 장영달 의원을 단일후보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예비경선에서 중위권에 머물렀다는 평가가 나오면서다. 원내 최대계파라는 위상이 무색하게 국정연내 소장파는 송영길 의원, 여성·일부 중견그룹은 한명숙 의원 캠프의 주축을 형성하면서 역량이 분산됐다는 것이 안팎의 평가다.
경선이 진행되면서 개혁그룹 내 주도권이 국정연에서 개혁당 그룹이 주축을 이룬 참여정치연구회로 넘어갈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김 장관측의 고민거리다. 국정연이 내세운 장 의원이 고전한 반면 참정연측 세 후보(유시민·김원웅 의원,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가 ‘가뿐히’ 예비경선을 통과한 데다, 대의원을 상대로 해 공개된 한 여론조사에서 장 의원이 김 전 장관, 유 의원에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 정동영 장관 | ||
이와 관련, 김 장관의 한 측근 의원은 “예비경선에선 ‘개혁 대 실용’이란 구도가 확연히 떠오르지 못하면서 장 의원이 고전했다. 참정연 후보들의 예상 밖 선전으로 연대가 다소 불투명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3일 열린 광주와 전남, 전북 대의원 대회에서 국정연 계열 인사들이 모두 시도당 위원장에 당선된 것에서 보듯 기층 대의원층으로 부터 세력 결집이 이뤄지고 있어 본선에선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참정연과의 연대도 그쪽에서 세 후보 간에 우열이 드러나 입장이 정리되면 본격적으로 논의가 이뤄질 것이다”고 밝혔다.
정·김 장관에 견줄 만큼은 아니지만 각각 영·호남을 대표해 당권 도전에 나선 김두관 전 행자부 장관과 염동연 의원의 강세도 권력지형 변화와 관련해 주목을 끄는 대목이다. 두 사람은 탈락이 거론될 만큼 고전이 예상됐지만 예비경선에서 문희상 의원에 이어 2~3위 다툼을 벌인 것으로 알려질 만큼 선전했다.
김 전 장관의 약진은 그가 보수적인 풍토의 영남에서 상대적으로 세력이 취약한 참정연 후보로 나섰음에도 높은 지지를 받고 있음이 확인됐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김 전 장관은 특히 한 여론조사에서 대세론을 구가하고 있는 문 의원에 근소한 차이로 추격중임과 대중적 인기에선 한수 위로 평가받았던 유시민 의원을 제친 것으로 나타나 일약 경선전의 최대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당내에선 영남그룹의 좌장 역할을 하던 김혁규 의원이 당권 도전을 포기하고 ‘문희상 지지’로 방향을 튼 것과 달리 참정연내 후보 난립, 미약한 당세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정면돌파에 나선 김 전 장관의 모험이 성공할 경우 여권 내 새로운 영남대표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40대 중반인 김 전 장관이 대권 도전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데다, 당내에 마땅한 ‘영남 후보’가 없다는 점에서 중장기적인 여권 내 역학구도에 무시못할 변수가 되리란 관측이 나온다.
염 의원의 ‘선전’은 개인의 위상 변화보다 그가 당권도전의 승부수로 던진 민주당과의 통합론이 힘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봐야 한다는 해석이 많다. 특히 염 의원과 함께 당내 대표적인 통합론자이자 같은 동교동계 출신인 문 의원이 ‘부동의’ 당의장 후보의 위치를 굳히면서 더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당내에선 문 의원과 염 의원이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호남권과 민주당 출신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지도부에 동시 입성할 경우, 여권 내에서 민주당과의 통합론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축으로 세력 재편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염 의원은 벌써부터 “민주당과 통합 없이는 내년 지방선거는 물론 내후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를 기약할 수 없기 때문과 민주당을 포함한 민주개혁 세력의 재결집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열린우리당이 그간에 민주당을 짓밟아온 게 사실 아니냐. 맺힌 감정을 풀어줘야 하는데 민주당의 부채 40억원을 당원모금을 해서라도 갚아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고 까지 제안하고 나서 당 안팎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