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소위 떴다 하는 드라마는 대부분 외주제작사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이렇게 외주제작사의 위상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 수익 창출의 꿈은 멀기만 하다. 지난해 독립제작사협회가 밝힌 국회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최고의 대박 드라마인 <풀하우스>와 <파리의 연인>을 통해 KBS(<풀하우스> 방영)는 약 20억원, SBS(<파리의 연인> 방영)는 약 29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는 외주제작사에 건넨 제작비와 방송발전기금 등 기타 비용을 제외한 순수익이다. 반면 외주제작사인 김종학 프로덕션(<풀하우스> 제작)은 적자를 봤고 캐슬인더스카이(<파리의 연인> 제작)는 단 1억원의 순수익을 올렸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외주제작사가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편성권’이라는 절대반지를 가진 자가 방송국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생 외주기획사의 경우 방송국의 편성 약속 없이는 제작을 시작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편성만 해준다면 저작권을 포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나타내기도 한다.
결국 편성권을 바탕으로 방송국은 저작권을 사수하는 상황에서 외주제작사가 방송국의 편성권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찾기 위해 급급한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절대반지’ 편성권에 맞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힘은 A급 스타에 있다. 흥행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증 수표인 A급 스타에게 출연 약속을 받아낸 외주제작사는 당당히 방송국을 상대로 편성 약속을 받아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효리의 드라마 데뷔작은 시놉시스도 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편성을 약속받아냈던 부분이다. 시놉시스는커녕 제작의 주체인 외주제작사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효리의 소속사는 SBS로부터 ‘이효리의 드라마 데뷔작을 2005년 1월에 편성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결국 절호의 찬스를 잡은 이효리의 소속사인 DSP엔터테인먼트는 자체 제작을 결정하고 구체적인 작업에 돌입, <세잎클로버>를 만들어냈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효리 주연’ 카드가 편성권을 뒤흔든 것이다.
고현정의 복귀작 <봄날> 역시 손쉽게 편성 약속을 얻어냈다. 고현정이라는 최상의 카드를 통해 처음으로 드라마 외주제작을 시작한 싸이더스HQ 역시 별 무리없이 가장 큰 난관을 넘어선 것이다.
▲ <봄날>(위)과 <세잎클로버>는 외주제작사가 A급 스타를 내세워 당당히 편성 약속을 받아낸 케이스. | ||
두 번째 방법은 능력있는 PD의 영입이다. 사실 가장 쏠쏠한 쓰임새가 보장된 이들이 바로 PD들이다. 우선 방송국의 편성권에 도달하기 쉽다. 외주제작사에서 드라마를 제작하더라도 연출은 방송국 소속 PD들이 맡는 경우가 상당수다. 드라마 제작에서 PD가 갖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므로 방송국 소속 PD가 연출을 맡으면 외주제작사의 제작권을 간접 통제할 수 있다. 외주제작사 입장에서는 이를 피하기 위해 소속 PD에게 연출을 맡기려 하지만 방송국에서 잔뼈가 굵은 중견 PD 출신이거나 흥행이 보장된 스타PD가 아니면 방송국이 이를 허용치 않는다.
지난 92년 국내에 최초로 외주제작업체가 도입된 이후 10여 년 동안 외주제작사는 변호사 사무실 같은 역할을 수행해왔다. 방송국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온 PD들이 외주제작사를 설립하면 방송국에서는 ‘전관예우’ 차원에서 편성권을 제공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 이런 이유로 외주제작사는 회사 지분까지 제공하며 전관예우가 가능한 중견 PD 잡기에 나서고 있는 현실이다.
진정한 블루칩은 소위 스타 PD다. 우선 그들은 흥행성이 보장되어 있고 A급 스타와의 탄탄한 인맥도 갖췄다. 하지만 역시 고가의 연출료가 부담이다. 유철용 이병훈 최윤석 표민수 이재규 등 스타 PD들이 대거 소속된 김종학 프로덕션의 홍현진 프로듀서는 “드라마를 모니터링하며 히트작이 있고 실력이 뛰어난 PD들에게 스카우트를 제안하고 있다”면서 “스타 PD의 경우 외주제작사마다 영입 경쟁이 치열해 A급 배우 개런티와 비슷한 수준의 거액을 보장해야 영입이 가능하다”고 얘기한다.
이미 스타 PD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외주제작사가 편성권의 칼날을 피해 저작권을 확보한 전례가 있다. <겨울연가>로 1백60억원 이상의 수익을 올린 팬엔터테인먼트의 경우 윤석호 PD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판권 확보에 성공했다. 이후 <겨울연가>는 욘사마 열풍으로 일본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리면서 팬엔터테인먼트는 웃고 판권을 포기한 KBS는 우는 상황이 연출됐다.
정인프로덕션의 이지나 대표는 “외주제작사의 소속 PD들이 드라마를 제작하면 촬영 회차를 줄이는 등의 방법으로 제작비 절감이 가능하나 방송국의 편성권을 받아낼 PD의 수는 제한되어 있다”면서 “영화계처럼 제작사에서 실력 있는 신인 PD를 발굴 육성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방송국이 이들을 인정하는 부분에선 어려움이 뒤따른다”고 나름대로의 고충을 토로했다.
▲ 지난해 11월 <비천무> 제작발표회를 가진 에이트픽스의 송병준 대표. | ||
현재 에이트픽스가 제작한 24부작 드라마 <비천무>가 최초로 이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양상은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방송 3사가 사전제작 드라마 길들이기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난무한 가운데 <비천무> 비토를 위한 방송3사 담합설까지 제기되고 있다. 결국 <비천무>는 어느 방송국에서 방영될지 편성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송병준 에이트픽스 대표는 “<비천무>가 앞으로 제작될 사전제작 드라마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는 얘기로 암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외주제작사가 A급 스타의 출연에다 스타 PD가 연출한 사전제작 드라마를 들고 방송국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다.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와 <슬픈연가>가 이런 방식의 전면전을 위해 제작된 드라마들이다. 자체 펀딩으로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를 제작할 당시 제이에스픽쳐스 이진석 대표는 “이 드라마가 모든 외주제작자의 꿈이 될 것”이라며 “사전제작을 통한 저작권 확보를 이뤄내겠다”고 얘기한 바 있다. 하지만 제작비 충당에 어려움을 겪으며 제작 중간에 사전제작을 포기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초의 사전제작 외주 드라마인 <비천무>의 경우 주진모, 박지윤 주연으로 주연급의 중량감이 조금 떨어진다는 반응이다.
방송국과 외주제작사 사이의 ‘중간계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과연 방송국이 편성권을 이용해 저작권 수호에 성공할 것인지, 외주제작사가 편성권의 칼날을 피해 저작권 확보에 성공할 것인지 브라운관 이면에선 숨막히는 전투가 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