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청래 전 대표는 정치적 격동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1965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정 전 대표는 재수 끝에 1985년 건국대학교 공과대학 산업공학과(85학번)에 입학했다. 이 시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산하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에서 활동했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참가했다. 다만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던 이인영 임종석 우상호 송영길 등과 달리 운동권 핵심은 아니었다고 한다.
1989년에는 주한미국 대사관저 점거 농성에 관여하며 이름이 오르내렸다. 농성을 주도한 ‘전대협 반미구국결사대’ 소속 대학생 6명 중 1명이 정 전 대표였다. 이들은 그레그 당시 주한 미 대사의 취임 취소, 노태우 대통령 미국방문 반대, 미국 수입개방 압력 철회 등의 구호를 외치다 50분 만에 경찰에 연행됐다. 그레그 전 대사는 당시 방화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다고 회고했다. 2006년 정 전 대표는 그레그 전 대사를 만나 이 사태에 대해 사과했다.
1989년 금지됐던 사교육이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1991년 학원 수강 허용이 교육감 재량에 맡겨지면서 사교육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졌다. 학생운동을 하다 취업 시기를 놓쳤거나 구속 등으로 ‘빨간 줄’이 있던 운동권 출신들이 생계를 위해 사교육에 뛰어들었다. 1992년 정 전 대표도 운동권에 있었던 양태회 씨와 함께 ‘길잡이 학원’을 창업했다.
노사모에 몸담았던 여권 관계자 A 씨는 “정청래의 위상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를 (노사모로) 이어준 사람이 미키루크 이상호 씨다. 정 전 대표가 학원을 했을 때 선생님이 100명 정도 있었다. 그 선생님들이 학생 운동하다 취업 못 하는 사람들이다. 5·18 때 되면 사비로 버스 대절해서 다 (광주) 망월동 갔다 오고 그랬다. 이상호 씨가 그런 모습이 괜찮다고 했다. 정치인으로 키워보자고 해서 같이 한 것”이라고 전했다.
정 전 대표가 운영했던 길잡이 학원은 당시 학부모들 사이에선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고 알려졌다. 학원 분위기가 지나치게 억압적이었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몇몇 학부모는 이에 대해 항의성 민원도 제기했다고 한다.

정 전 대표는 2004년 ‘노무현 탄핵 역풍’에 힘입어 이른바 ‘탄돌이’로 17대 국회에 입성했다. 이때 언론개혁 부문을 담당하며 기성 언론과 대립각을 세웠다. 2007년 17대 대선은 정 전 대표에게 분기점이 됐다. 당시 정 전 대표는 대통합민주신당(열린우리당 후신) 정동영 후보 캠프 홍보위원장을 맡았다. 이때 변호사 신분이던 이재명 대통령이 비서실 부실장 겸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정 전 대표는 ‘친노무현계(친노)’ 주류와 갈등을 빚었다. 당시 정동영 측은 ‘노무현 탈당론’을 꺼냈고, 친노 진영은 정동영 진영과 이해찬 진영으로 갈라졌다. 정 전 대표는 이해찬 진영에 있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향해 공격했다. ‘유시민은 정치 기술자’ ‘입만 열면 거짓말’ ‘고약한 사람’ 등 원색적인 표현을 썼다.
A 씨는 “정동영 후보는 노무현 정부 지지율이 떨어지고 언론 공격이 계속되니까 정권을 잡기 위해 차별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래서 탈당하라 그런 것”이라며 “그래서 정청래가 같이 (진영으로) 엮인 측면이 있다. 직접 (노무현에) 나쁜 이야기를 한 것은 없다. 노 전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도 다 같이 봤다”고 했다.
#친노→친문→친명→친청
17대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했다. 정 전 대표는 2008년 19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정 전 대표는 ‘죄송합니다. 저 중국에 갑니다’라는 글을 올리며 베이징 인민대학교 1년 과정 방문 학자 자격으로 중국행 소식을 알렸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김성동 후보와 무소속 강용석 후보를 꺾고 다시 국회로 복귀했다. 2015년에는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이때 당의 최전방 공격수를 뜻하는 ‘당대포’라는 별명을 부각했다.
‘당대포’의 첫 포문은 문재인 당시 대표를 향했다. 문재인 지도부의 ‘중도 확장’ 목적의 박정희·이승만 묘역 참배를 두고 “유대인 히틀러 묘소 참배”라고 직격했다. “노무현 정신은 온 데 간 데 없고 노무현 명찰 달고 젠틀맨쉽만 호가호위한다. 이래서 집권하겠나”라는 글도 올렸다. 이러한 발언 이면에는 강성 지지층의 전폭적인 지지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 있다는 평가다. 이 시기 정 전 대표는 본격적으로 ‘당원과 국민만 믿는다’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이러한 논란들은 2016년 20대 총선 공천에 영향을 미쳤다. 김종인 비대위는 정청래 전 대표를 컷오프했다. 당시 정 전 대표 지지자들이 당사 앞 항의시위를 열었고, 최민희 의원이 재고를 요청하는 등 김종인 비대위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컷오프는 정 전 대표에게 두 번째 분기점이 됐다. 정 전 대표는 탈당 대신 경선 탈락자와 불출마 선언자로 구성된 ‘더컷 유세단’을 이끌며 선거 운동에 열을 올렸다. 오늘날 정 전 대표 지지층이 이용하는 ‘딴지일보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2016년 10월 13일 정 전 대표는 ‘이 시대 참 딴게인(딴지 게시판인) 정청래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일종의 팬클럽인 ‘청래당’도 결성됐다.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SNS)에 활발하게 글을 올리며 지지자들과 소통했다. 딴지일보를 운영하는 김어준 씨, 현재 반목하고 있는 이동형 작가 등 민주당 대형 스피커들이 그를 지원했다. 2017년에는 인기 시사 프로그램 JTBC ‘썰전’에 출연했다.
2018년 정 전 대표는 MBN ‘판도라’에서 “이재명 지사가 말하면 항상 분란이 일어난다”며 “도와주기 싫고 생각하기도 싫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최근 ‘명청 갈등’ 국면에서 뉴이재명 지지층에 의해 다시 회자되고 있다.
그러다 국회 복귀 뒤인 2021년 12월 13일 정 전 대표는 “나는 흙수저였고 이재명은 무수저였다”며 “이재명은 대통령이 될 자격과 실력이 있다”고 적었다. 이는 송영길 당시 대표의 ‘릴레이 이재명 바로알기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친문에서 친명으로 정체성이 변화한 대목이다.
이 대통령이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석패한 다음에도 “10년 전에도 대선 패배 후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에게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하라'고 주장한 의원들이 있었다”며 “그 후로 문재인을 흔들던 사람들은 끝내 탈당하고 딴살림을 차렸다”며 ‘이재명 책임론’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21대 대선에서 이 대통령이 당선된 다음 당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당대표직에 올랐다. 그러나 ‘전 당원 1인 1표제 추진’ ‘민주당-조국혁신당 합당 논란’ 등으로 이재명 정부와의 엇박자 논란에 휩싸였다. 친명계는 정 전 대표가 당 대표 연임을 위한 자기 정치를 했다고 공격했고, 민주당 내홍은 끊이지 않았다. 이는 지방선거에서의 아쉬운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논란을 뒤로하고 정 전 대표는 6월 24일 사퇴했고, 당 대표 연임이라는 시험대에 올랐다.
정동영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여권 관계자 B 씨는 “정청래는 계파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계파가 자기 계파다. 어느 편에 있더라도 그쪽에 맞게끔 말한다. (유연한) 정치에 아주 능한 사람이다. 지금은 내란청산 국면이다. 선명하고 강경한 이미지로 시대정신에 맞게끔 자신을 부각하는 데 성공한 사례다. 이런 것에 능하다 보니 자기 정치와 공적인 일을 하는 것이 스스로 구별이 잘 안될 것이다. 열심히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자기 정치로 보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B 씨는 과거의 위계관계가 영향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정동영 대선 캠프에서) 정청래는 의원이었고 이재명은 변호사였다. 위치로 봐서는 정청래가 위였다. 그리고 둘 다 SNS 힘으로 컸다. ‘내 밑에 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됐는데 나는 못하는 법이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재명은 성남시장과 경기지사를 하면서 실적을 냈다. 그런 부분을 간과하는 듯하다. 단순히 기계적으로 비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