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15일 한나라당 박세일 의원이 행정도시법 국회 가결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 기자회견을 가졌다. “당 밖에서 할 일이 더 많다”고 강조한 그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정치권이 그의 행보에 촉각을 곧추세우는 것은 행정도시법에 대한 반대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는 보수의 시대라며 구보수 혁파와 보수 개혁론을 주창해온 박 의원은 대표적인 보수이론가의 한 사람으로, 한나라당의 이른바 ‘빅3’의 대권 후보 경쟁 및 2007년 대선 판도에 적잖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가 집필을 주도한 국가경영 전략서인 <대통령의 성공조건>은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정부의 마스터 플랜을 작성하는 ‘텍스트’로 사용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박 의원은 금배지는 버리지만 정치권은 떠나지 않는다는 방침을 굳혔다. 지난 14일 김원기 국회의장에게 의원직 사퇴서 수리를 거듭 요청하기 위해 상경했던 그를 만났다. 박 의원은 “정당은 ‘비전과 정책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고 단언했다. 또 “그런 확신을 가진 전투적 자유주의자들이 모여야만 한나라당이 다음 대선에서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한나라당이 지향해야 이념과 사상에 대해 “첫째 이웃 공동체, 둘째 역사 공동체, 셋째 환경공동체를 추구하는 공동체 자유주의”라며 “그것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노선은 개혁적 보수, 즉 혁신적 보수”라고 설파했다. 그의 말에는 자신의 이상을 펼쳐 보이지 못한 학자뿐 아니라 정치인으로서의 미련과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당 밖에서 할 일이 더 많다”고 강조한 그의 다음 행보는 어떤 것일까. 정치권에서는 그가 박 대표나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등 ‘빅3’중 한 명과의 연대할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 그는 행정도시법에 대한 입장차로 노선을 달리한 박 대표에 대해 “박 대표의 이번 선택(행정도시법 찬성)은 잘못된 것”이라면서도 “박 대표 개인에 대한 호감은 그대로”라고 애정과 기대를 표시했다. 정책적 노선 차이로 길은 달리했지만 차기 대권 후보로서의 가능성은 열어 놓고 있다는 말이다.
지난해 4·15 총선 때 박 대표와 함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탄핵역풍으로 고사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을 구한 그는 박 대표와는 ‘동지’ 이상의 끈끈한 관계를 맺어왔다. 정책 정당에 대한 집착이 강한 박 대표는 그에게 한나라당 비례대표 선출에 관한 전권을 부여했고, 선거 후에는 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소장과 정책위의장에 임명하는 등 크게 의지했다. 박 의원은 “총선 때 박 대표의 높은 대중적인 인기를 실감했다”며 “이런 정치인은 노 대통령과 박 대표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빅3’ 중 개인적 친분이 두터운 사람은 손학규 지사다. 경기고, 서울대 1년 선배인 손 지사와는 대학교 때부터 인연을 쌓아 왔다. 서울대 법대 출신인 박 의원은 법대 1년 선배였던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사회법학회’라는 운동 서클을 만들어 활동했다. 조 변호사는 <전태일 평전>을 쓴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로, 당시 문리대의 손 지사와 상대의 운동권 대부였던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과 더불어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렸다.
손 지사 한 측근은 “박 의원이 사퇴서를 제출한다는 소식을 미국 출장중에 접했던 손 지사는 직접 만류편지를 써 전달하려 했다”고 말했다. 김영삼(YS) 정부시절에는 손 지사가 보건복지부 장관을, 박 의원은 청와대 정책기획 수석을 맡아 손발을 맞추기도 했다. 하지만 행정도시법 수용을 주장하는 손 지사와는 현재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박 의원은 ‘빅3’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면서 한나라당 강화론을 피력했다. “어떤 장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수가 탈 말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당이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장수가 역발산의 기개를 갖고 있다 한들 조랑말을 타고 어떻게 전쟁을 이길 수 있겠느냐”며 ‘준마론’을 강조했다. 그는 노자의 ‘이천하 관천하(以天下 觀天下:천하의 눈으로 천하의 일을 보라)’를 인용했다. 백성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야지, 빅3의 입장에서 세상을 봐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준마론’에 근거해 박 의원이 당밖 새로운 보수세력인 ‘뉴라이트 운동’과의 결합을 내다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박 의원이 뉴라이트의 중심축 역할을 한 뒤 대선 전에 이들을 이끌고 한나라당과 어떤 식으로든 합친다는 시나리오다. 이는 한나라당 단독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한나라당 한계론과 맥을 같이 하는 논리다. 즉 ‘빅3’가 되든, 또 다른 제3의 후보가 되든 간에 현재의 한나라당으로는 안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박 의원이 보수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영향력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다”라며 “이럴 경우 박 의원이 빅3와 연대하지 않고 독자적인 대권 후보로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신보수 세력이 한나라당 등 구보수에 염증을 느낀 보수세력의 대안세력으로 떠오를 경우 신 보수의 지도자로서 자연스럽게 박 의원이 급부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1년간 한나라당을 속속들이 들여다 본 박 의원은 “무기력증과 현실안주에 빠진 한나라당의 가장 큰 문제는 야성 부족”이라며 “‘당이 깨진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치열한 내부 투쟁을 벌여야 살 길이 보일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이념적 분포는 좌파 30%, 중도 30%, 보수 30%”라며 “한나라당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세대전략, 이념전략, 정책전략을 통해 중도와 보수를 합치는 60% 전략이 나와야 한다”고 피력했다.
노 대통령의 참여정부 입각제의를 세 차례나 거부했고, 지역구를 물려 주겠다는 한나라당 최병렬 전 대표의 입당 권유까지 거절하며 구보수와 단절했던 그가 신보수 세력의 결집과 정치세력화를 위한 어떤 마스터 플랜을 짜고 있는지 주목된다.
유영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