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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과 연인 모두에게 늘 싱글벙글, 완벽한 안식처이자 연인으로 남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연희의 표정에도 역시,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다. | ||
인류가 그렇게 오랫동안 그 ‘버릇’ 남 못 줬다면, 어쩜 그건 우리의 본성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든다. 결혼해 한 남자, 한 여자를 평생 마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바람기를 부추기는 것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끝까지 ‘주류’에 속하는 이 일부일처제에 대해 단호히 “노!”라고 외치지는 못한다.
말로는 기껏 반항하는 척 해도 결국은 ‘정상으로 가는 관문’이라 믿어지는 그곳에 안착하기 위해 마음을 졸이는 것이다. 마치 그게 모든 해결점이라도 된다는 듯이! (물론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결혼하고 나면 대부분 곧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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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강사인 준영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연희는 일단 갖은 얌전을 다 떤다. | ||
일단 주인공 연희는 모든 면에서 주도적이고 개방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보수적인 데가 많은 독특한 캐릭터. 사회경력 8년 차의 조명 디자이너. 도발적이고 섹시한 매력이 있는 여자지만 올 서른인 자신의 나이를 의식해 여러 번 선을 본다. 결혼은 그녀에게 ‘반항하기 힘든’ 과제. 그녀는 사회에서 용인하는 ‘정상적인 여자’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결혼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여자다. 그런 양면성은 영화 내내 흥미롭게 나타난다. 대학강사인 준영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녀는 일단 갖은 얌전을 다 떤다. 맥주 한 잔도 많다며 “저 술 못 마시는데…” 하고 몸을 사리고, 새침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웃으며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왕 선 보러 온 거니까 질문은 단도직입적으로!
“뭐 하시는 분이에요? 돈은 많이 모아두셨나요? 장남인가요?” 얼굴 화끈 달아오를 만한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그녀. 역시 끝까지 정체를 숨기기엔, 노처녀로 남아 있는 그 시간들이 너무 초조하고 버거웠던 건지.
아무튼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두 사람은 화통하게 그날 밤 ‘택시비 아끼는 셈 치고’ 여관으로 직행한다. 한편 장남에다, 가진 돈 없는 대학강사 준영은 연희와 달리 결혼제도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갖고 있다. “나랑은 정말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야?”란 상대의 진지한 질문에 “내가 변하지 않을 자신,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다”라고 대꾸한다. 이 점은 ‘무리해서라도’ 결혼을 감행하려는 연희와 상반되는 대목. 어쩜 그가 옳은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솔직한 건지도.
암튼 그녀는 일상을 연기처럼 쓱쓱 해내는 유능한 여자임엔 틀림없다. 속으론 동의하지 않을지언정 ‘결혼제도에 합당한 참한 여자’로서의 임무를, 적어도 겉보기엔 완벽하게 수행해 내니까! 그리고 뒤로는 ‘정말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치운다. 돈 없고 지위 없는 남자, 그러나 정말 사랑하는 그 남자와의 진짜 로맨스를 ‘또 하나의 현실’ 한 구석에 요술처럼 ‘뚝딱’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결혼’이라는 형식을 취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그녀(이 정도면 정말 중증이다). 비록 진짜 법적인 남편은 아니지만 그와 함께 ‘신혼여행이라 이름 붙인 외도’도 하고, 음식도 만들어 먹고, 면도도 해주고 손톱도 깎아주고, 한가한 휴일 오후도 나른한 포만감을 느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결혼에 이르진 못했어도 ‘그와 유사한’ 생활을 해내는 것, 그리고 그때마다 이를 사진에 담아두는 것. 그녀의 이런 강박증은 준영과의 그 모든 순간들을 담은 앨범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너 겁도 안 나니? 유부녀가 그러다 꼬리 잡히면 어쩌려고 그래?”
걱정해준답시고 이딴 식으로 핀잔을 줘도 소용 없다. 어디까지나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니까. 맞다, 그녀는 삶의 아이템 대부분을 그런 ‘결혼제도’를 통해 비춰보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검증되지 못하면 불안하고 불편하고. 그러면서도 막상 연인과의 찐한 섹스는 포기할 수 없고. 지극히 보수적인 면과 기존 가치관을 뛰어넘는 대담함이 좌충우돌 그녀 주위를 동시에 불안하게 감싸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도리어 괴로워지는 건? 결혼 안하겠다고, 자신 없다며 실컷 잘난 척(?)하던 준영. 그녀가 퇴직금으로 마련해 준 옥탑방에서 살게 되는 그는, 열정적인 섹스를 나눈 그녀가 시치미 떼고 안정적인 가정으로 돌아가고 나면 홀로 남아 망연자실 묘한 자괴감에 휩싸이게 된다. 결혼제도가 주는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애초의 시도는 이쯤에서 품위 없이 왕창 날아가버린 셈. 하긴,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해졌다 싶겠지? 더는 못 참겠다 싶은 준영, 후두둑 비 내리는 차 안에서 그녀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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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인공 연희는‘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 외도를 또 하나의 부부생활처럼 꾸려가는데…. | ||
“이거 들키지 않아야 하는데….”
중요한 건 모럴이 아니라 ‘편의상’ 완전범죄여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꼬리 잡히지 않는 한 실컷 누리고 싶다는 욕망. 이건 요즘 사람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꽤 인상적인 멘트였다. 심지어 그녀는 침대 위에서 달콤한 표정을 지으며 연인에게 말한다.
“나 큰일이야. 이젠 죄책감도 없어. 뭔가 남들보다 더 바쁘게 산다는 생각뿐이니.”
하긴, 그녀는 자신의 포기할 수 없는 외도의 대가로 그야말로 발에 땀 나도록 뛰어야 한다. 남편 몰래 애인과 집 보러 다니고 가구 고르고 청소하고 음식하고 섹스하고…. 모든 게 ‘더블’인 거다. 준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결혼 혹은 가정의 그림자가 서서히 자신의 옥탑방 안까지 차오름을 느낀다.
“그만 둬! 난 라면 먹을 테니까 맘대로 해.”
부지런히 요리하고 있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할 수 있는 말이란 기껏 그것뿐. 마침 그녀가 만들려던 요리는 콩나물 비빔밥이었는데.
“왜 하필 그거야?”
“별미잖아(까르르). 기대해도 좋아.”
그때부터 그는 기분 팍 상하는 거다. 그렇잖아도 가뜩이나 찜찜하던 참인데, 이제 그녀는 ‘별채’인 자신의 은거지에 와서 ‘별미요리’를 만들겠단다. 기가 막혀. 이쯤 되면 모든 원망은 엉뚱하게도 콩나물 비빔밥으로 퍼부어지고 만다.
“난 사양하겠어, 너에겐 별미요리가 필요한지 몰라도!”
그렇게 쏘아주는 건 일종의 피해의식 내지 상실감에서 퍼올린 그의 진심. 이쯤에서 우린 그의 아픔에 동참해 주는 수밖에 없겠다. 아니, 아직 중요한 게 더 남았다. 이른바 ‘그 여자의 사정’. 나름대로 성공적인 ‘두 마리 토끼 잡기’에 나선 듯 보이지만 실은 그녀야말로 이번 ‘바람’의 최대 피해자. 남편과 연인 모두에게 늘 싱글벙글, 완벽한 안식처이자 연인으로 남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녀의 표정에도 역시,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다.
사회적 시선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 결국 반항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원하는 걸 포기할 수도 없는 이 딜레마. 거기서 타협점이라고 찾은 게 고작 이 어정쩡한 지점이었던 거다. 멋진 저택과 옥탑방 사이. 그 경계선을 수시로 넘나드느라 결국 그녀는 다른 여자들보다 두 배는 바쁘게, 혹독하게 ‘아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자, 과연 이 영화에서 정말 행복했던 사람은 누구인지?
결혼은 미친 짓이라며 내내 피해의식에 젖어 사는 부류나, 결혼은 죽어도 해야 한다고 철석 같이 믿는 부류 모두 어떤 강박관념의 희생자임엔 분명하다는 것. 그 점을 이 영화는 산뜻하고 뜨끔하게 포장해 보여준다. 결혼에 관한 이제까지의 그 어떤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꺼리들이 많이 숨어 있는 영화다. 찾는 건 각자의 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