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 | ||
정치권에선 여야가 문 의장을 흔들고 있다는 데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다. 여당 내에선 일부 지도부와 기 싸움을 벌이는 한편 개혁성향 의원과 당원들로부터 강한 비난과 견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더불어 상생정치를 약속했던 한나라당 일각에서도 일부 언론을 통해 ‘문희상 고립무원’ 작업에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문희상 의장과 가까운 한 인사는 문 의장의 요즘 심경을 ‘고립무원’이라는 표현으로 압축했다. 당 의장인 까닭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외롭다’는 얘기다. 이 인사는 “재보선 참패 이후 문 의장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일을 강하게 추진하기보다는 그날그날 당 의장으로서의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데 급급한 것 같다”고 말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국지>의 장비로 비유될 만큼 호탕했던 그가 요즘은 주눅 든 모습이라는 평가다.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대체로 당 지도부가 새로 들어서면 강하게 당을 혁신하고, 여당으로서 국민에게 청사진을 제시해야 하는데, 요즘 의장의 모습에선 별로 그런 게 보이질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 문 의장이 줄기차게 공약했던 ‘강한 리더십’은 공염불에 불과한 것일까. 문 의장의 측근들은 이에 대해 한결같이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지금은 다소 주춤한 상태이긴 하지만 조만간 ‘원기 회복’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렇지만 문 의장이 처한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인다. 근소한 차이나마 야당보다 앞섰던 당 지지율이 최근 들어 곤두박질치면서 역전 당한 것은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그래도 이보다 문 의장을 ‘고립무원’ ‘의기소침’의 늪으로 빠지게 한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23 대 0으로 참패한 재보선 성적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
문 의장은 재보선 과정에서 “(선거 결과) 전체가 잘못되면 사퇴하는 것까지 검토하겠다”고 호언할 정도로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설마’했던 우려는 사실로 판명됐고, 이에 문 의장의 충격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재보선 후보 공천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데다, 선거 패배가 문 의장 체제의 실정으로 빚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여론이 우세, ‘책임론’으로 번지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문 의장이 ‘나 몰라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정치 행보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게 여당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당 지도부에 속한 유시민 의원 등 개혁파는 실용파를 표방하는 문 의장과 견제와 갈등 관계에 놓여있다. 이는 지난 3일 임시국회 과거사법 표결에서 개혁파가 ‘찬성’ 당론에 반발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재보선 참패 이후 당의 환골탈태를 모색하기 위해 구성된 혁신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 의원은 최근 사석에서 “그들(문 의장을 포함한 실용파 지도부)은 실용파가 아니라 반개혁파다. 그들은 개혁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고 힐난했다.
이처럼 개혁파가 실용파를 겨냥해 비난하는 분위기에 대한 불만의 표출인지 문 의장은 개혁파를 향해 “생판 무임승차한 사람들이 자기 혼자만 개혁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만 옳다’는 도그마에 빠진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당 지도부 내에서도 문 의장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문 의장이 맡고 있던 국회 정보위원장 후임 자리를 놓고 정세균 원내대표와 미묘한 마찰을 빚고 있는 것. 문 의장은 배기선 의원을 자신의 후임으로 내정한 데 비해 정 대표는 신기남 의원을 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위원장 임명권은 정 대표가 갖고 있어 문 의장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재보선에서 패배하고, 당 지지율이 하락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스타급 정치인의 부재를 들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의 ‘조기복귀론’이 불거진 것도 문 의장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대목이다.
더욱이 개혁파 성향의 당원들은 ‘노골적으로’ 문 의장을 비난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 당원 게시판에 열성적으로 글을 올리는 개혁파 성향의 당원들 일명 ‘당게파’는 ‘문희상이 말하는 실용은 실용이 아니라 구태다’ ‘문희상 물러나라’ ‘문희상이 당을 말아 먹는다’는 등 연일 비난을 퍼붓고 있는 상황.
여당 내부만이 아니다. 야당인 한나라당도 문 의장 흠집 내기 전술을 구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4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문 의장은 새끼손가락까지 걸면서 상생정치를 다짐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일각에선 일부 언론을 통해 문 의장과 관련된 각종 의혹 정보를 흘리고 있다. 여권에선 “한나라당이 문 의장에게 치명타를 날리기 위해 일부 언론에 문 의장 관련 정보를 흘리고 있다”고 강하게 의심했다.
정가에선 대체로 오는 10월 재보선이 문 의장의 향후 정치 파워를 가늠케 하는 중대 기로라고 보고 있다. 여당의 핵심 관계자는 “4월 재보선은 문 의장의 작품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10월 재보선에서 패하면 문 의장 책임론이 거세게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문 의장을 포함해 당 지도부가 중도에 낙마할 수 있다. 하지만 괜찮은 성적이 나오면 내년 지방선거까지는 거침없이 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10월 재보선 성적표가 신통치 않으면, 문 의장이 2년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전면에서 한 발 물러나야 할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기회 있을 때마다 문 의장은 ‘개혁과 민생의 동반성공’을 강조했다. 하지만 ‘동반 성공’으로 가는 초입부터 주춤거리고 있다. 일각에선 “무기력증에 빠진 게 아니냐”는 관측마저 나오고 있다.
문 의장의 한 측근은 이와 관련해 “아직 문 의장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판’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며 ‘판짜기 미완성론’을 거론했다. “당 의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재보선을 뛰는 바람에 당 내부의 ‘판짜기’가 미뤄졌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좀 더 기다려봐야 ‘뭔가 보여줄 수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