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8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했다. 두 사람 사이의 ‘역사적 화해’를 바탕으로 최근 한나라당과 민주당 간에 부쩍 ‘온기’가 흐르고 있다. | ||
재보선에서 ‘압승’하면서 정국 주도권 장악에 자신감을 갖게 된 한나라당이 호남권을 겨냥해 집중적인 ‘러브 콜’을 보내고 이에 화합하듯 민주당 내에서도 한나라당을 바라보는 시각이 한결 부드러워지면서다. 특히 “대선에서 두 번 실패했는데, 세 번째 실패한다면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박근혜 대표)이라며 배수진을 치고 나선 한나라당 내에 2007년 대선 필승전략으로 ‘민주당과의 연대를 통한 연합정권 창출’을 거론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난 상황이다.
주목되는 것은 양당 간에 ‘온기’가 흐르게 된 근저에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한나라당 박 대표과의 ‘역사적 화해’가 놓여 있다는 점이다. 두 사람 간에는 이미 지난해 8월 중순 박 대표가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으로 DJ를 찾아간 자리에서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많은 피해를 입고 고생한 것을 딸로서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이고, 이에 DJ도 “과거 일에 대해 (박 대표가) 그렇게 말해주니 감사하다. 정치를 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가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준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박 대표는 영호남 화합의 적임자이니 수고해달라”고 화답하면서 기본적인 신뢰관계는 형성되어 있다는 평가다.
두 사람 간의 화해 기류는 최근 한나라당이 DJ에 대해 부쩍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더욱 짙어지고 있다. 한나라당 지역화합특위(위원장 정의화 의원)가 중심이 돼 소속 의원 5명이 5월26일 DJ의 생가가 있는 전남 신안군 하의도를 방문한 것은 이 같은 흐름을 나타내는 대표적 사례다.
이번 행사를 주도한 정 의원측은 당초 지역구 의원이자 DJ의 ‘정치적 양자’로 불리는 민주당 한화갑 대표와 함께 하의도를 찾는 방안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개별 방문이 아닌 당 특위 차원의 행사란 점에 부담을 느낀 한 대표가 ‘일정상의 이유’를 들어 빠지면서 불발로 돌아갔다는 후문. 한 대표측은 대신 한나라당 의원들의 하의도 방문에 불편함이 없도록 신안군 소속 행정선 제공을 조치하는 등 ‘성의’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DJ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한나라당 정의화 의원과 민주당 한 대표가 참여하고 있는 ‘민족대통합을 위한 국회의원 연구모임’이 6월15일 DJ정부의 역사적 공과를 재조명하는 토론회를 열기로 한 것이 대표적인 예. 이미 “정치적 견해에 따라 과(過)가 없다 할 수는 없으나 DJ는 전체적으로 보면 남북정상회담과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참여 등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정착을 이루는 데 헌신하는 등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거인으로 국가 미래를 위해 늘 현명한 방향을 제시하고 업적 또한 출중했던 분”(정의화 의원) 등의 찬사가 나오고 있다.
DJ를 고리로 호남에 다가서려는 한나라당의 움직임에 민주당도 경계감을 표출하면서도 DJ와 박 대표의 화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기류다. 유종필 대변인은 “영호남 간의 갈등을 풀기 위해서는 (박 대표의 선친인) 박 전 대통령과 DJ의 화해가 이뤄져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의 딸이 한나라당의 대표이고 대권 도전을 앞두고 있으니 박 전 대통령과 DJ의 화해가 향후 지역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혀 주목을 끈 바 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과 김종필 전 총재, 아래는 한화갑 대표(왼쪽)와 박근혜 대표 | ||
북핵 사태 등 남북문제를 매개로 DJ에 다가서려는 박 대표측의 움직임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측근들 사이에선 중국 방문 기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등을 면담하는 등 북핵 해결을 위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박 대표가 조만간 DJ를 다시 찾아 방중 결과를 토대로 북핵 해법에 대해 교감을 넓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
한 측근은 “DJ와 박 대표는 남한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밀도 있는 얘기를 나눠 본 ‘유이(唯二)한’ 분들”이라며 “동교동에서도 박 대표가 지난 3월 미국 방문에서 북미 직접대화 등 햇볕정책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힌 이후 그의 대북 정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 두 분이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박 대표가 ‘DJ 모시기’에 공을 들이는 배경은 뭘까. 당내에서는 박 대표의 2007년 대선 필승전략과 연계짓는 시각이 많다. 이미 두 번의 대선 패배를 통해 ‘영남당’의 한계로는 정권 탈환이 무망하다는 사실이 확인된 만큼 호남과의 화해를 위해 ‘DJ 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 궁극적으로 민주당과의 연대를 꾀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이를 반영하듯 최근 박 대표 주변에선 DJ가 97년 자민련 김종필 총재(JP)와 이른바 ‘DJP 연합’을 구축해 집권에 성공한 경험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박 대표의 한 측근은 “호남의 상징은 누가 뭐래도 DJ이며 4·30 재보선에서 드러났듯 호남 사람들은 노무현 정권에 등을 돌리고 DJ의 정치적 계승자인 민주당을 선택했다. 한나라당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DJ를 매개로 한 호남과의 화해는 충분히 가능하며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실제 한나라당 보수성향 의원들 사이에서도 ‘한나라당·민주당 연합정권’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영남권 한 중진은 “민주당과의 연대는 근대화세력과 민주화 세력과의 결합, 영호남 간 지역화합이란 측면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다음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민주당과의 통합을 이뤄야 하며 이를 위해 당권·대권 분리를 당내에서 고민할 것이 아니라 대권 후보는 한나라당에서 내고, 당권은 과감하게 민주당에 줘야 한다. 상황이 어려우면 총리까지 민주당측에 할애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민주당도 한나라당과의 연대에 대해 과거처럼 ‘절대 불가’만을 고집하지는 않는 분위기. 특히 한 대표는 “누가 희생이 되더라도, 우리가 국민통합이나 민족통일을 염두에 두고 한나라당과의 관계를 동서화합 차원에서 설정해야 한다. 이것은 국가적, 또는 국민적 차원의 얘기다”라고 말해 주목을 끌고 있다. 2004년 한나라당과 연대했던 3·12 탄핵사태로 엄청난 후폭풍을 겪은 것에 비춰 볼 때 그의 발언은 호남의 일반적 정서와 다소 어긋나더라도 동서화합이란 대의 명분을 위해 다시 한나라당과 손잡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