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재섭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최근 ‘박근혜 대세론’을 흔드는 등 대권주자로 행동반경을 넓히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1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강 원내대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박근혜 대표와 함께 ‘투 톱’을 형성하고 있는 강 원내대표가 원내 장악력을 기반으로 대권주자로서의 행동반경을 넓히려는 움직임이 도처에서 감지되면서다. 3월 초 김덕룡 전 원내대표의 ‘도중하차’로 원내 사령탑의 바통을 이어받은 그가 석 달여 동안 ‘빅3’(박 대표-이명박 서울시장-손학규 경기지사)와는 다른 차원에서 실력자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내부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던 시기에 강재섭 원내대표가 원내대표에 선출될 때만 해도 당내에서 그의 역할을 주목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5선 중진이지만 박 대표와 같은 TK(대구·경북)에 기반을 둔 탓에 “영남당 이미지를 더욱 고착시킬 것”이란 비판에다 5·6공의 민정계 출신이라는 점도 핸디캡으로 비쳤다.
그러나 막상 ‘칼자루’를 쥔 후 강 원내대표가 보여준 모습은 “소리없이 세상(당)을 움직인다”(강용석 중앙위원)는 평가를 받을 만큼 ‘기대 이상’이었다. 데뷔 무대였던 4월 국회에서 박 대표를 설득해 과거사법 여야 합의처리와 국가보안법 상정 문제를 타결지었고, 상임위 정수조정 문제로 파행 위기에 몰린 6월 임시국회 초반엔 여당에 전격적으로 양보안을 제시해 정상화를 이뤄내는 등 만만찮은 정치력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당내에선 강 원내대표가 당내 기반을 빠르게 넓혀가고 있는 이유로 특유의 친화력과 신속한 상황판단 능력을 꼽고 있다. 원내대표단의 한 의원은 “계파-선수 구분없이 누구를 대하더라도 사람을 편하게 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강 원내대표 본인도 얼마전 몇몇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제까지 단 한번도 전임 지도부를 공격한 적이 없고, 양보만 거듭해 온 탓에 그리 인심을 잃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가 뭘 하겠다고 하면 설혹 불만이 있는 분들이라도 ‘강재섭이가 하는 일인데 좀 봐주자’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고 자부한다. 그것이 요즘 당이 평온을 되찾은 원인 중 하나일 것”이라며 의원들과의 유대에 강한 자신감을 표시한 바 있다.
“나이 60 다 돼서 능참봉 자리 겨우 하나 얻은 것”이라며 몸을 낮추면서도 박 대표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원내대표서의 권한을 적극 행사하고 있는 것도 당내에 어필하고 있는 요인이다. 그는 평소 “지도부는 지도하라고 있는 것이지, 의원들 얘기만 듣기만 한다고 능사가 아니다”며 “우여곡절을 거쳐 늦게 지도부가 된 만큼 임기 마지막날까지 내 권한을 100% 행사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실제 강 원내대표는 지난 1일 상임위 정수조정 요구를 거둬들인 배경에 대해 “우리 주장이 정당하지만 국민들의 눈엔 국회가 또 밥그릇 싸움을 하는 줄 아실 것 같아 큰 결심을 했다. 열린우리당이 상수도로 치면 꽉 막힌 상수도인데 막힌 데는 한나라당이 풀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과정에서 박 대표와 조율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건 원내대표가 알아서 하는 것이다. (박 대표에게) 위임을 받았고 전화할 필요도 없었는데 친절하게 전화까지 했다”며 독자적 결단임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대권주자군으로 평가받는 강 원내대표가 최근 박 대표와 당내외 현안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특히 재보선 이후 당내외에서 확산되고 있는 이른바 ‘박근혜 대세론’에 대해선 강한 톤으로 브레이크를 걸고 나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5월26일 S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른바 “특정 정치인이 대세를 이룬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용어다. 과거 3김 시대와 이회창 총재 시대에는 대세라는 게 있었으나 지금 한나라당엔 없다”며 선을 분명히 그었다. 당시 중국을 방문중이던 박 대표측은 이 같은 발언내용을 전해듣고는 “강 원내대표가 정말 그렇게 얘기했느냐”며 술렁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 원내대표는 이에 앞서 5월20일엔 KBS 라디오에 나와 “날씨가 계속 좋으면 사막이 된다. 비도 오고 폭풍도 쳐야 만물이 성장하듯 한나라당도 날씨가 매일 좋다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로 비주류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박 대표를 향한 강 원내대표의 연이은 ‘쓴 소리’를 당내에선 그의 향후 진로와 연계하는 분위기다. ‘빅3’와 달리 대중적 인지도 면에서 뒤쳐지는 강 원내대표가 ‘반전’의 기회를 잡기 위해선 특정인에 힘이 쏠리는 것을 막아내야 하는 사정 때문이란 것이다. ‘원내’로 활동무대가 좁아지는 점을 알면서도 당내 기반을 넓히기 위해 지금의 자리를 선택한 강 원내대표로선 임기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대권 레이스에 뛰어들 내년 2월까지는 당내 세력균형이 무엇보다 절실했을 것이란 해석이다.
강 원내대표는 당면 역할에 대해 “한나라당을 정책정당으로 만들고 당의 튼튼한 울타리를 만들어 나든, 누구든 내년 6~7월 이후 대권 도전자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도록 하는 게 임무”라 밝혔다. 대권도전과 관련해 딱부러진 언급은 피했지만 ‘나든, 누구든’이란 표현을 통해 자신도 대권을 노리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는 얼마전 한 사석에서 “내년 2월 말까지 원내대표로 있으면서 당내 기반과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데 주력하겠다. 여론조사에서 지지도가 5%만 넘어서면 본격적으로 한번 뛰어보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내에선 “‘킹’을 노린다”는 강 원내대표측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킹 메이커’로 보는 시각이 많다. 지난 시기 정치적 고비에서 보였던 우유부단함과 ‘모질지 못한’ 캐릭터 탓에서다. 영남권의 한 3선 의원은 “강 원내대표는 민정당 시절 정계입문 이후 한번도 대세를 거스른 적이 없다. 정치생명을 걸어야 할 대권레이스에 뛰어들기엔 너무 ‘나이브’(naive)한 사람이다. 더구나 동향에 그 자신이 ‘정치경력으로나 나이로나 동생 뻘로 대하고 있다’고 한 박 대표와 날을 세워 경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강 원내대표와 함께 ‘국민 생각’ 소속인 한 재선 의원도 “그가 진정 대권주자의 꿈이 있다면 더 이상 박 대표의 부족한 리더십을 채워주는 역할만 하면 안된다. 그런데 너무 인간적이어서…”라는 말로 비슷한 시각을 표출했다.
실제로 한나라당의 ‘토니 블레어’를 내세우며 98년 8월 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회창 당시 명예총재와 맞서려다 “아직 나이가 어리니 차기를 노리라”는 TK지역 여론에 따라 주저앉은 것이나, 2002년 당 대표 경선에서도 당시 이회창 대선 후보 진영의 ‘공작’으로 4위에 랭크되는 ‘수모’를 당하고도 묵묵히 상황을 수용했던 것 등도 강 원내대표의 ‘결단력 부족’의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황영조 선수의 진가가 막판 38km 지점에서 나타났듯 한나라당내 차기 대권구도도 잘 지켜봐야 할 것”이라며 대권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강 원내대표. 그가 과연 당내에 형성된 ‘대권 회의론’을 극복하고 ‘빅4’로 부상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