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7년 청문회에 참석한 김현철씨(왼쪽)와 2002년 구속되는 김홍걸씨. | ||
역대 정권의 레임덕 현상을 통해 지금 노무현 정권이 과연 레임덕 현상에 빠져들었는지 진단해 본다.
“우리나라처럼 5년 단임 정권에서는 조기 레임덕이 필연이다. 권력이란 것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위의 말을 잘 따라야 되는 것인데 차기 주자 눈치를 보는 게 자연스런 레임덕 아닌가. 다음 실력자의 눈치를 보면서 현재의 실력자에 대해 100% 복종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런 레임덕이다. 그것을 촉진하는 것이 부정부패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밖에 권력 주변에서 불신 요소들이 증폭됨으로써 완전히 레임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김영삼 정권 때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광일 변호사의 증언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역대 정권에서 레임덕 현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정치학자들은 본격적인 레임덕이 오기 전에 반드시 ‘적색경보’가 먼저 발령된다고 한다. 김영삼 정권의 예를 들어보자. YS정권은 출범 4년차에 접어들던 97년 1월 한보사태가 터지면서 본격적인 레임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미 레임덕의 ‘적색경보’가 발령되었다. 장학로 청와대 부속실장 수뢰사건이 바로 그것. 그는 김영삼 대통령의 ‘가신’ 출신으로서 권력의 최측근 인사였다. 장 실장은 김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이른바 ‘문고리 권력’을 이용하여 27억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구속됐다. 김영삼 정권은 출범 3년째를 맞아 권력 핵심부의 비리로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때부터 대통령 주변 인사들을 제대로 관리했다면 후에 현철씨 사건으로 비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사건의 ‘단초’를 미리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장학로 사건이 일어나고 1년여가 흐른 뒤인 97년 1월에 한보사태가 터졌다. 당시 재계 서열 14위이던 한보그룹이 부도를 맞으면서 이와 관련된 권력형 금융 부정과 특혜 대출 비리가 드러났다. 특히 김영삼 정권의 도덕성에 심각한 치명타를 가한 것이 대통령 차남 현철씨와 국가안전기획부 운영차장 김기섭씨 등 ‘현철 사단’이 한보사태와 관련돼 구속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급격한 레임덕에 시달리게 된다.
다음은 당시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광일 변호사의 증언.
“한보사태로 김영삼 대통령이 힘이 빠진 게 사실이다. 아들이 구속되는 바람에 그렇게 기가 센 YS도 힘이 빠져서 조깅도 그만두었지 않았느냐. 당시 마산의 김홍조옹은 YS에게 ‘니한테 아들 잡아넣으라고 대통령 하라고 했나’라며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부인 손명순 여사도 매일 울면서 하소연했던 것으로 안다. 이렇게 되니 YS가 잠을 잘 수가 있었겠나. 대통령이 다른 걱정이 많으면 국정을 제대로 신경 쓸 수 없다. 그 뒤 YS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 총재를 후보로 공천하면서 급격하게 힘을 잃게 되었던 것 같다.”
김대중 정권 때는 출범 1년 반만에 레임덕의 적색경보가 발령되었다. 바로 옷로비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지난 99년 5월 김태정 검찰총장 부인 등 고관집 부인들이 이영자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으로부터 고급 의상을 ‘선물’ 받았다는 의혹이었다. 당시는 DJ정권의 지지도가 내리막을 타던 시점이었다. 이 과정에서 헌정사상 최초로 특검제가 도입되는 등 DJ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또한 검찰조사와 청문회 등이 1년 내내 국민의 눈과 귀를 붙잡았는데 고위층 부인들의 추한 로비실상과 은폐의혹이 드러나면서 민심은 등을 돌렸다.
▲ 지난 5월27일 청와대 본관 계단을 내려오는 노무현 대통령. | ||
DJ는 집권 5년차에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된 홍걸씨, 아태재단 비리로 구속된 홍업씨 사건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가파르게 리더십을 상실해간다. 그리고 그 여파로 집권 민주당은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에 참패하게 된다. 당시 여당을 담당했던 한 일간지 기자는 “DJ는 7개월 남은 임기를 무난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여성 총리’ 카드(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를 꺼냈지만 실패했다. 뒤이어 장대환 총리 카드도 무산돼 급격하게 권위를 상실해갔다. 더구나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총리 인선 과정에서 DJ의 인사권에 반기를 들어 반대표를 던지는 등 레임덕을 재촉하기도 했다. 당시 민주당의 한 의원은 ‘이제 대통령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탄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출범 2년을 갓 넘긴 노무현 정권은 과연 지금 레임덕에 빠졌다고 할 수 있을까. 일단 야당의 주장을 들어보자.
먼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 5월27일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레임덕은 정부 여당이 하기에 달렸다. 더 이상 안되겠다고 국민의 마음이 멀어지면 빨리 올 것”이라며 노 정권에 포문을 열었다. 뒤 이어 강재섭 원내대표는 “조기 레임덕에 빠진 정부는 반성하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 뒤 송영선 이윤성 의원 등도 잇따라 “북핵 위기와 경기침체, 공공요금과 세제 인상으로 서민의 고통이 가중되는 내우외환의 상황에서 대통령의 레임덕은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까지 공격했다.
‘노무현 저격수’로 통하는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도 레임덕 공세에 동참하고 있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레임덕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에 임기 말에 가까워서 나오는 것인데 지금 국정운영의 난맥상, 비전 부재, 연속적 부패 스캔들, 전국적인 재보선 실패 이런 것들이 겹쳐서 레임덕이 빨리 오는 것 같다. 절반도 안 지난 사람을 레임덕이라 하면 이상하지만 국민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고 밝혔다.
비록 야당의 정치공세이긴 하지만 여권에서는 현재의 ‘레임덕 논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그 예가 바로 유전 개발 특검 수용이다. 이것이 물론 의혹에 대한 여당의 자신감의 발로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부 여당 의원들은 “특검으로 여야가 치열한 정쟁을 벌이고 국정운영이 표류한다면 조기 레임덕으로 연결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이해찬 총리는 최근 대통령의 측근 문제를 공개 거론하고 대통령 소관인 자문위 시스템 정비까지 들고 나왔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이 총리가 대통령의 레임덕을 사전에 막아보자는 뜻에서 한 발언이라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이를 놓고 보면 여권이 현재 노무현 정권의 조기 레임덕을 의식하고 있고 대책도 마련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여당 의원들은 야당의 레임덕 공세에 대해 “주관적인 희망사항”이라며 평가절하하고 있다.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오일 게이트 등에 비리가 있다면 그것은 문제다. 거기에 부당한 특혜가 있고 부당한 금품수수가 있고 비리가 있다면 당연히 처벌을 해야 하지만 이 정부 들어 그런 것들을 감싸고 넘어간 예는 없다. 그것이 역대 정권의 레임덕 현상과 명백하게 다른 점이다”라고 밝혔다.
한편 학계에서는 정치권의 레임덕 논란에 대해 “비생산적인 국력 소모”라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우리나라는 단임제이기 때문에 일단 집권 몇 년이 지나면 모두 차기에 관심이 많아 필연적으로 레임덕이 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에게 레임덕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 노 대통령과 여당의 낮은 지지율, 언론의 ‘지원’ 결여, 그리고 이런 저런 사건들이 터져 나오면서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다 보니 그런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데 바람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지금 레임덕 논란이 불거지면 우리는 근 2년 반을 차기 선거와 관련된 이야기들로 보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사회적 소모가 너무 크다”고 밝혔다.
하지만 강 교수는 노무현 정권이 ‘조만간’ 레임덕을 겪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내년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여권에 레임덕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그때가 되면 노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도 어느 정도 내려지고 여야의 대권 후보들이 본격적으로 경쟁을 하게 된다. 대통령 선거도 1년 반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차기에 대한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레임덕 논쟁이 다시 불붙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지방선거 전이라도 정동영 김근태 장관이 당에 복귀할 경우 훨씬 빨리 레임덕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레임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첫째는 임기 말이 가까워지면서 통치권력이 약화되어 가는 일반적 현상이다. 둘째는 잘못된 통치와 실정,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로 민심이 등을 돌리고 권력의 누수가 심화되어 정국경색, 사회불안, 경기침체 속에 국정전반의 혼란이 지속되거나 정권의 수명을 단축하게 되는 등 권력이 무력화되는 상황을 말한다고 한다(이성춘 전 고려대 교수).
집권 2년을 넘어선 노무현 대통령은, 과연 레임덕의 늪으로 빠져든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