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변했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그러니까 15년 전쯤인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보통 남자들에게 이상형을 물으면 99.9% ‘긴 생머리의 착하고 예쁜 여자’란 답이 흘러나왔었다. 한국 남자들 이상형이 바뀌면 얼마나 바뀔까, 관심을 끊고 방치한 지 십 수년 만에 이상한 변화 기류를 감지할 수 있었다. 연예인이나 주위의 평범남이나 할 것 없이 새로운 조항을 달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날 잡아줄 수 있는 여자’,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여자’란 것.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평소 매너와 애교가 넘친다고 느꼈던 남자 후배 A가 술자리에서 그런 여자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늘어놓기까지.
그는 3~4세 연상에 확실히 능력이 되는 여자를 찾고 있었다. 물론 미모와 우수한 두뇌를 포기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결혼하면 평수는 좀 작아도 월세 300 정도의 서비스드 레지던스(호텔식 서비스가 제공되는 공동주택)에 살고 싶어요. 모기지론으로 집 사서 평생 갚으려면 매달 100만 원 넘게 들어갈 텐데, 거기에 아줌마 쓰는 걸 가정하면 레지던스가 결코 비싼 게 아니거든요.” 먹고 사는 문제로 아등바등하지 않고, 공부도 하며 정신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삶. 그런 꿈을 이루어줄 여자가 바로 이상형이라고 말했다.
‘날 잡아줄 여자’란 생활 습관을 교정해 줄 여자가 아닌 물질적,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여자를,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여자’란 노력만 하는 여자가 아닌 성과가 뛰어난 여자였던 것이다. 이거야말로 우리 여자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존경할 수 있는 남자’에 대한 리버스(reverse) 버전이 아닌가.
와인 리스트나 맛집 맵을 꿰는 것도 중요하다. 남자끼리 있을 땐 어떤지 몰라도, 수저를 놓거나 물을 따르는 데 매우 익숙할 뿐 아니라, 밥풀 한 톨 안 흘릴 만큼 깔끔한 식사 매너마저 지니고 있다. 여자가 많은 직장에서, 이들은 애인뿐 아니라 성공까지 쉽게 거머쥔다. 30대 중반의 패션 업체 간부인 지인은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출근한 날, 얼굴만 알던 옆 부서 남자 직원에게 이메일을 받았다. “부장님, 헤어스타일이 무척 잘 어울리시네요. 부장님 같이 멋진 분이 계셔서 저는 행복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OOO 올림.” 입 안의 혀처럼 구는 남자 부하 직원, 올드미스나 유부녀 상사라면 키워주지 않곤 못 배긴다.
이들의 앙큼한 행태의 결정타는 과거사의 최소화. 연예인들이나 날리던 공수표라 여겨지던 “여자 친구요? 2년 전에 헤어졌어요” 따위의 발언이 거침없이 흘러나온다. 공인된 한 앙큼남 B는 언뜻 보기에도 순수하고 어딘가 외로워 보여서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타입. 말도 없는 편이지만 눈빛만큼은 진실하며(?) 항상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오직 여자 동료들만 알고 있는 사실에 따르면 최근 3년간 B에게 여자가 끊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평소 그와의 ‘진실한 만남’을 즐기는 여자 친구들이 많아서, 한 여자와 헤어지더라도 바로 다음으로 인수인계 되기 때문이다. 동료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숭악한 넘’이다.
이들이 꼭 물질적 이익을 생각해서 앙큼한 행각을 계속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정말 여자 친구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 혹은 ‘더 사랑 받고 싶어서’란 순수한 이유일수도 있다. 일부 앙큼남들은 자기 일도 열심히 하면서 최소한의 앙큼함만을 구사하는데, 이들을 일컫는 또 다른 호칭이 바로 ‘훈남’. 대개 외모나 배경이 평범한 것이 특징이다.
앙앙 컨트리뷰팅 에디터=이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