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17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왼쪽은 박근혜 대표. 사진제공=통일부 | ||
지난해 7월 초 정부 내 외교-안보-국방을 총괄하는 책임장관 자리에 앉았지만 얼마 전까지 북핵사태와 남북관계 경색으로 ‘죽을 쑤던’ 정 장관이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행사차 북한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갖는 ‘월척’을 낚은 이후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정 장관으로선 ‘뜻밖의 소득’을 얻어 여권 내 대권경쟁에서 한 발 앞서갈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됐지만, 이전까지 남한 내 대권후보군에선 ‘유일하게’ 김 위원장과 단독면담(2002년 5월13일)을 했던 박 대표로서는 그동안 독점했던 ‘김정일 프리미엄’ 효과가 반감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의 신경전은 정 장관이 방북을 마치고 귀경하자마자 김 위원장 면담 등의 성과를 적극 홍보하기 위한 전방위 행보를 펼치면서 싹트기 시작했다. 정 장관은 서울로 돌아온 당일(17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평양 방문의 성과를 보고한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 예방(19일),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오찬회동(20일)을 가진 데 이어 야당 대표들도 직접 만나겠다는 계획을 언론에 밝혔던 것.
그러나 ‘개선장군’처럼 여야를 누비려던 정 장관의 구상은 한나라당 박 대표가 브레이크를 걸면서 차질이 생겼다. 정 장관측이 전화로 “북쪽에서 이야기한 것 가운데 국민 앞에 밝히지 못하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이를 전하겠다”고 면담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대북문제는 투명성이 중요하며 국민 앞에 밝혀야지 야당 대표만 비밀스럽게 들을 필요가 없다”는 거절뿐이었다.
예상보다 ‘냉랭한’ 박 대표측의 반응에 정 장관측은 “전화로라도 설명을 하겠다”며 한발 물러섰고 20일 오전 두 사람은 6~7분간 통화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알력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이 “정 장관이 박 대표와의 통화에서 ‘김 위원장이 원활한 금강산 관광을 위해 남측이 남북교류협력법을 개정해달라’고 말했다”고 브리핑했지만, 정 장관측이 곧장 “김 위원장이 방북 승인절차를 폐지 또는 완화를 희망하는 얘기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남북교류협력법 개정을 직접 요청한 것은 아니다”며 일부 사실을 부인하고 나섰기 때문.
박 대표측은 정 장관측의 이 같은 태도에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식 언론플레이”라며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정 장관과 박 대표의 신경전은 두 사람의 측근들이 서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더욱 가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열린우리당 내에서 정 장관의 핵심측근으로 꼽히는 김현미 의원은 2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박 대표님, 치마폭처럼 넉넉한 마음을 보여주십시오’라는 제목의 글에서 박 대표가 정 장관의 면담요청을 거부한 것에 대해 “정 장관을 만나 방북성과를 인정하고 향후 협조할 것을 흔쾌히 약속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 주장한 후 “박 대표의 이런 태도는 너무도 실망스럽다. 몇 해 전 박 대표가 성공적인 방북활동을 했을 때에도 당시 정부 여당이 얼마나 환영했는가”라고 꼬집었다.
정 장관측의 ‘도발’에 박 대표측에선 전여옥 대변인이 맞대응에 나섰다. 전 대변인은 박 대표에 대한 비판에 대해 “여당이 박 대표에게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안되며 집권당으로서 제대로 일이나 해야지 남의 집안 걱정할 시간이 없을 것 같다”며 ‘훈수’한 후 “넉넉한 치마폭 운운할 게 아니라 대북 투명성부터 지켜야 한다. 정 장관이 별 것도 아닌 것 갖고 비밀 운운하면서 괜히 국민의 의구심만 키우고 의혹만 부풀렸다”고 받아쳤다.
정 장관의 김 위원장 면담 이후 한나라당이 그가 상임위원장으로 있는 NSC(국가안전보장회의)에 대한 공세강도를 높이고 나선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이른바 ‘흑기사회’ 멤버로 당내 박 대표의 측근으로 꼽히는 권경석 사무부총장이 21일 국회에서 개최한 NSC법 개정 관련 공청회에서는 외부 참석자들의 ‘입을 빌려’ 정 장관을 원색적으로 성토하는 발언이 ‘봇물’을 이뤘다.
“대권을 노리는 사람은 반드시 통일부 장관을 맡으면 안 된다. 무리하게 된다”(한양대 김동민 교수)는 발언은 점잖은 축에 든다. 김광동 나라정책원장은 “6·15행사에서 정 장관이 김 위원장을 만나는 모습, 그 광경에서 ‘동지적 관계’를 느낄 수 있었다. 정 장관은 ‘존경의 념(念)’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지적 관계라는 그 끈끈한 마음을 보이고 조아렸다. 스탈린이나 히틀러보다 못한 그 사람을 만나 ‘동지적 념’을 갖고 머리를 조아리는 게 문제다. 나라의 정통성과 정체성과 안보의식을 무너뜨리는 그 선봉에 (정 장관이) 서고 있다”라며 ‘극언’에 가까운 평가를 내놔 공청회장을 술렁이게 할 정도였다.
정 장관측은 대외적으론 한나라당의 집중공세에 “방북 성과를 흠집내려는 시도로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는 느긋한 입장이다. 여론조사(글로벌 리서치, 18일 조사)에서 국민의 70%가 ‘정·김 면담이 한반도 평화와 긴장해소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응답하는 등 ‘반향’이 고무적인 데다, 북한측에서 8·15 광복절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키로 한 만큼 남북관계도 적어도 이 시점까지는 순항할 것이란 낙관론이 힘을 얻고 있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측근 그룹 일각에선 정 장관이 ‘김정일 프리미엄’을 바탕으로 여권 내 차기 대권경쟁에서 확고한 위상을 확보하는 만큼 야당의 공격강도도 거세질 것이란 점에서 열린우리당 조기 복귀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재임 1년을 넘기면 ‘대권수업’도 할 만큼 했다 할 수 있고 ‘김정일 프리미엄’도 확보한 만큼 이제 본격적인 대권가도를 달려야 할 시기가 됐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내 한 측근 의원은 “김 위원장이 정 장관에 밝힌 대로 북한이 7월에 6자 회담에 복귀해 북핵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마련되면 (정 장관이) 서서히 행정부 생활을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때가 되면 국민들에게 ‘성공한 장관’ 이미지를 충분히 심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난조를 보이고 있는 당을 추스리는 과정에 명실상부한 구심점으로서의 역할도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9월 정기국회가 열리기 전까지 행정부에 남게 되면 연말까지 당으로 돌아오기 어렵게 돼 10월 재보선에 출마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됨은 물론, 야당의 표적공세로 잔뜩 생채기만 입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