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17일 북한을 방문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왼쪽)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회담하고 있다. 정 장관의 비파일엔 김 위원장의 답방소식이 담겨있는 듯하다. 사진제공=통일부 | ||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최근 종료된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북측은 기대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회담에 임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북측이 솔직히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회담을 한 것은 접어두더라도 내용 면에서 거의 이견이 없을 정도로 매끄러웠던 회담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한결 같은 전언이다.
이는 윗선에서의 조율된 조치가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 아니었겠느냐는 해석이 나오는 토대가 된다. 이번 회담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한 관계자는 “지난 6·17 평양 회담에서 정동영 장관과 김정일 위원장 사이에 모종의 약속 또는 거래가 있다고 추론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한 언론의 보도내용도 눈길을 끈다.
“…홍석현 주미대사가 지난 22일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만남에서 아직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 이 신문은 “우리 정부가 김 위원장의 메시지 몇 가지를 밝히지 않고 있음을 공식 확인한 것”이라는 논평까지 했다. 파장이 크게 일자 이 신문은 24일자에서 홍 대사의 말을 인용해 “정 장관이 북측에 제의한 것 중 몇 가지 발표 안 한 게 있다고 한 말인데 영어로 인터뷰하다 보니 기자가 (거꾸로) 알아들은 것 같다”고 했지만 이를 둘러싼 추측은 그치지 않고 있다.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정 장관과 김 위원장 사이에 오간 말 중 드러나지 않은 대화내용은 ▲다자간 안전보장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지원 등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이는 정 장관이 김 위원장에게 내놓았다는 중대제안의 내용과 별 다른 게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권과 정부의 정보소식통들은 정-김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것은 이를 뛰어넘는 수준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한 소식통은 “김 위원장은 남쪽이 듣고 싶어하던 것을 전부 이야기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정 장관이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 공개되지 않은 어떤 대화내용을 갖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정 장관은 회담 당일인 17일 밤 기자회견에서 ‘6자회담 7월 중 복귀 가능성’ 등 몇 가지를 1차 공개했다.
그 뒤 국회에 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북·미 수교시 미사일 포기 의사’ 등 세 가지를 다시 공개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겨 놓은, 폭발적 위력을 가진 그 무엇이 있을 거라는 것이다. 과연 뭐가 남았을까.
이와 관련해 정동영 장관의 한 최측근인사는 “이번 평양회담이나 장관급회담의 ‘총연출’은 정동영 장관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라”면서 “지난 1월 다보스포럼에서의 정 장관의 연설을 상기하라”고 귀띔했다.
지난 1월30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폐막연설장. 정동영 장관은 이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오는 11월 부산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체(APEC) 회의에 참석해줄 것을 희망하는 ‘사실상의 초청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은 정 장관의 폐막연설 주요내용.
‘…한반도의 영구평화는 북한 핵문제 해결을 통해 가능합니다. 남북한과 미·중·러·일이 참여하는 6자회담이 2003년 시작되었으나 안타깝게도 7개월째 교착상태로 있습니다. 6자회담 참여국들의 결단과 선택이 필요합니다. 반복적인 교착이 아니라 진전을 위한 협상이 필요합니다. 특히 북한의 전략적 결단이 중요합니다. 북한은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11월 APEC 정상회담 이전에 6자회담을 통해 북핵문제의 실질적 진전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탈냉전의 역사적 상상력을 구체화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핵을 포기한 북한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지금은 국제적 지도자들의 비전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만일 북한이 APEC에 참여할 수 있다면 6자회담 당사국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셈입니다. 그것은 핵무기 없는 한반도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축하의 자리에 북한의 지도자가 참석하기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미공개 부분은 바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내용은 아닐까. 정-김 회담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김정일 위원장 간 정상회담’에 이은 ‘제2의 남북정상회담’ 또는 ‘김정일 답방’에 대한 추측성 보도가 간헐적으로 나온 게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참석하는 고위인사가 “올해가 가기 전에 정상회담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정 장관은 지난 17일 회견에서 “중대제안을 설명했고 김 위원장이 연구해서 답을 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중대제안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정 장관이 ‘북한 체제 보장과 대북 경제지원을 포괄하는 과감한 조치’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의지를 확인한 뒤 이를 바탕으로 김정일 위원장 답방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나온다.
김 위원장의 답방을 받아내기 위한 더욱 확실한 보장책, 예컨대 북미 수교 현실화, 대북지원의 영구적 제도화 같은 것을 내줬을 수도 있다. 나아가 김정일 위원장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 즉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체제변혁) 불가 약속 혹은 북한 내 정권 유지와 관련된 보장일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어찌됐든 정-김 회담에서 오간 비공개 밀담의 내용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미 정동영 캠프와 정부 일각에선 오는 11월 부산 APEC 행사에 맞춰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하는 것을 전제로 한 제2차 남북정상회담 준비와 시뮬레이션 작업에 돌입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진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