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A 업체는 ‘장래사업계획 또는 경영계획’을 공정공시했다. 그 내용은 중견 연예인 전속 계약 체결과 관련된 것으로 모두 32명의 중견 연예인이 그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추가로 20여 명의 연기자와 전속계약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바로 다음 날 A 업체는 유상증자를 결정했음을 신고·공시했다. 유상증자에 제3자배정 대상자로는 모두 37명이 결정됐는데 전날 계약을 체결한 중견 연예인 32명이 전원 포함돼 있었다. 며칠 뒤 A 업체는 연예인 친목단체인 B 단체와의 공동사업 계약 체결을 공정공시했다. 그동안 톱스타들의 유상증자 참여가 대부분 주가 급등으로 연결됐지만 이들 중견 연예인의 유상증자 참여가 주가 상승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견 연예인 전문 연예기획사 탄생은 남다른 의미가 있어 보였다.
지난 3월에는 성대한 창립식이 열렸고 A 업체 소속 연예인들은 B 단체 연예인들과 함께 사회봉사에도 앞장섰다. 스타들이 즐비한 기존의 연예기획사들에게 선배들이 모인 중견 연예인 전문 연예기획사다운 모범을 보인 것. 또한 A 업체는 스타마케팅을 접목한 새로운 사업 영역에까지 진출했다.
이처럼 A 업체가 연예계에서 의미 있는 출발선을 지나고 있는 동안 증권가에서는 조금씩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결국 지난 5월 ‘최대주주의 유상증자 가장대납설 및 횡령설의 사실여부 및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조회공시요구가 있었다. 이에 A 업체는 연예인 관련 최대주주의 유상증자 가장납입설에 대해 수사기관의 조사가 진행 중이며 해명자료를 수사기관에 제출했음을 공시했다. 곧이어 경찰이 중견 연예인이 연루된 주가조작 의혹을 수사 중이라는 언론 보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A 업체는 6, 7, 8월 석 달 동안 한 달 간격으로 한 번씩 ‘수사기관에서 조사가 진행 중이나 아직 밝혀진 사실은 없음’을 조회공시했다. 또한 관련 보도를 한 언론사에는 ‘내용증명’을 발송하고 무분별한 기사에 법적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해당 연예인들도 혐의를 적극 부인했다. 주가조작을 위해서였다면 중견이 아닌 톱스타를 영입했을 것이며 우회상장 이후 오히려 주가가 떨어졌음을 강조했다. 매스컴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전속계약금 일부를 주식으로 받았는데 법적 절차를 밟기 위해 회사 측에 위임장을 써준 것”이라며 가장납입설을 부인했다. 이들 연루 연예인들은 경찰 소환조사에서도 처음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한다.
경찰이 A 업체 관련 수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 2월. 검찰 정보원 사칭 브로커를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하면서 시작됐다. 이 사건의 피해자로부터 A 업체 실 경영자가 주가를 띄우기 위해 유명 연예인들을 앞세우고 명동 사채업자들의 자금을 끌어들여 주금을 가장 납입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 8개월여의 수사 끝에 강남경찰서 수사과 지능 2팀은 지난 10월 29일 수사 내용을 브리핑했다. 지능2팀장 김태수 경위는 “A 업체의 실 경영자인 대표이사는 구속, 7명의 피의자는 불구속 수사 중”이라고 밝혔는데 A 업체 관계자, 사채업자 등과 함께 두 명의 연예인도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 우선 중견 연예인 K는 A 업체 이사로서, 구속된 대표이사의 전횡을 방조해 특별 배임의 혐의를 받고 있다.
또 한 명의 연예인 Y가 받고 있는 혐의는 주가조작과는 별개의 사안이다. A 업체 대표이사와 함께 방송국 PD K 씨에게 레포츠단 소속 연예인 15명을 사극에 출연시켜 달라는 부정한 청탁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것. 연예인 관련 주가조작 수사 과정에서 방송국 현직 PD가 연루된 연예계 비리가 드러난 셈이다.
경찰은 A 업체가 K 씨에게 법인카드와 금품을 제공했다는 혐의를 포착해 대가성 여부를 수사 중이다. 현재 K 씨가 연출 중인 사극 드라마에는 A 업체와 공동사업 계약을 체결한 B 단체 소속 연예인 15명이 주조연급으로 출연 중이다. 워낙 사극에 중견 탤런트가 대거 출연하는 터라 중견 연예인 전문 연예기획사인 A 업체와 관련된 중견 탤런트 15 명이 함께 출연한다는 게 자연스럽게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출연 로비 의혹이 숨겨져 있었던 것.
지금까지 적발된 연예계 로비는 대부분 톱스타와 대형 연예기획사를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따라서 중견 연예인이 이런 연예계 로비 사건에 연루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드라마 출연이 더욱 절실한 이들은 톱스타보다 중견 연예인들이다. 몇몇 인기 중견 연예인들의 겹치기 출연으로 인해 작품 출연이 요원한 중견 연예인들이 상당수인 것. 중견 연예인 전문 연예기획사의 탄생이 연예계에서 갖는 의미는 작품 출연에 어려움을 겪는 중견 연예인들의 캐스팅 과정을 체계적으로 지원해줘 경쟁성을 높여줄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경찰이 혐의점을 두고 있듯이 ‘체계적인 지원’ 대신 ‘불법 로비’가 이뤄졌다면 그 의미가 퇴색하고 말 수도 있다.
지난 8월 경찰은 사극이 촬영 중인 지방에서 PD K 씨를 만나 수사를 벌였다. 당시 K 씨는 “A 업체의 법인카드를 쓴 것은 사실이나 대가성은 없었으며 돈이 오간 것은 채무채권 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우선 K 씨는 A 업체의 법인카드로 드라마 제작진의 식비와 숙박비 등을 사용했다. 경찰은 A 업체 법인카드의 사용 내역서를 증거로 확보해 놓은 상태다. 그렇지만 K 씨가 연출 중인 드라마 관계자는 “출연 배우나 소속사에서 제작진의 식비 일부를 지원하는 것은 하나의 관례”라면서 “톱스타들이 제작진에게 점퍼를 사줬다는 기사가 종종 나오는데 그걸 대가성이라고 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또한 이 드라마에 출연 중인 B 단체 소속 중견 탤런트 몇몇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할 말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K 씨가 채무채권 관계라고 밝힌 돈에 대해 강남경찰서 이지춘 수사과장은 “1억 원을 빌려주고 1억 5000만 원을 돌려받았다는 데 이를 통상적인 채무채권 관계로 볼 수 없어 금품수수로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또한 “법인카드를 수사가 시작된 지난 4월 A 업체에 다시 돌려줬고 K 씨가 연출하는 드라마에 소속 연예인 15명이 출연 중임을 감안해 배임수재 혐의를 수사 중”이라며 “금품수수 관련 증거가 확보되면 2차 소환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야심차게 출발한 최초의 중견 연예인 전문 연예기획사는 ‘주가조작’과 ‘금품수수’라는 두 가지 악재로 인해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사회봉사 활동에 앞장서며 후배 연예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 칭찬이 나온 지 반년도 안 돼 연예계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와 연루돼 힐난의 눈길을 받고 있는 것.
한편 A 업체 측은 강남경찰서가 수사 브리핑이 끝난 뒤 “(경찰)조사가 시작되고 9개월이 지났으나 아직까지 어떤 혐의사실도 인정되거나 공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거론된 연예인을 비롯한 주주, 그리고 당사가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면서 “본 사건은 경영권 분쟁을 시도 중인 당사의 전 대표이사 측의 일방적인 주장에서 발단이 된 사태”라는 입장을 밝혔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홍재현 객원기자 hong92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