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가 21일자 1면(위)에서 안기부 도청테이프의 존재를 보도함에 따라, MBC는 특종을 손에 쥐고도 물먹은 셈이 됐다. 아래는 MBC가 대대적으로 후속보도를 한 22일 <뉴스데스크> 화면. | ||
두 번 ‘망신’당한 MBC
현재 ‘이상호 X파일’과 관련한 언론의 보도양상은 MBC를 결과적으로 궁지로 몰아넣은 양상을 띠면서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애초 테이프를 가지고 있던 MBC가 ‘1보’를 <조선일보>에 뺏긴 데 이어, 21일 저녁 <뉴스데스크>에서 방영된 내용이 같은 시각 KBS <뉴스9>에서 방송된 내용보다 오히려 미흡한 것으로 나타나자 MBC로 비난의 화살이 집중됐다. 지난 21일 KBS와 MBC 등 방송사들의 보도 이후 대다수 신문들이 일제히 22일자에서 관련기사를 비중 있게 보도했던 점도 MBC의 입장을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이에 MBC는 대대적인 후속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삼성, 방송금지가처분 신청
하지만 삼성 등의 대응도 만만치 않아 이번 사태는 자칫 삼성과 언론간의 전면적인 갈등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삼성은 지난 21일 MBC가 ‘X파일’을 방송하려 하자 서울남부지법에 방송금지가처분 신청을 냈고, 서울남부지법 제51민사부(부장 김만오)는 ‘도청 테이프의 원음 방송’과 ‘등장인사의 실명 언급’에 대해 가처분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지난 1997년 대선 직전 삼성 인사가 일부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나눈 대화라며 불법도청 테이프를 매입한 것을 기초로 한 일체의 보도 내용”에 대해 ‘테이프 원음방송’과 ‘등장인사 실명 언급’을 하지 말라며, 이를 위반하는 경우 1건 당 5천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원음방송 불가’에는 음성 변조나 아나운서의 대독 또한 포함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재판부가 금지한 대목을 제외한 ‘테이프 녹취 내용 방송’은 가능하다.
그런데 MBC를 상대로 안기부 도청테이프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낸 변호사가 남부지법 수석부장판사를 지낸 변호사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전관예우 논란이 일고 있다. 가처분 신청을 낸 삼성측 변호사는 남부지법 수석부장판사를 지낸 김아무개 변호사로 지난 2월 퇴직한 뒤 남부지법 주변에서 개업한 것으로 확인됐다. 향후 법적 소송으로 갔을 경우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수 있는 부분이다.
녹취록에는 어떤 내용
먼저 지난 21일 KBS는 <뉴스9>에서 테이프에 녹취된 언론사 간부와 대기업 고위 간부의 실명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직접 입수한 녹취록을 부분적으로 인용했기 때문에 매우 구체적이다.
KBS는 “모 재벌 기업 총수의 지시에 따라 자금 전달자가 직접 지정됐으며 당시 유력 후보에 대해서는 중앙일간지 고위인사가 직접 (자금을) 전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모 후보는 이 기업에 30억원을 요구한 반면, 또 다른 모 후보는 10억원을 요구했다” “15억원을 운반할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30억원은 무겁기 때문에 모 후보의 동생에게 (자금을) 건네는 장소로 백화점 지하주차장을 정했다” 등의 내용을 <뉴스9>에서 보도했다.
KBS는 또 “모 중앙일간지 고위인사가 모 자동차를 해당 기업이 인수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한 뒤 정치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당시 재벌 기업 고위인사에게 제시했으며, 이 재벌 기업 고위인사는 모 의원도 좀 줘야하는 것 아니냐고 하자 중앙일간지 고위인사는 조금 하시는 게 좋을 것이라며 5천만원만 보내주라고 했다”는 내용도 전했다.
KBS는 이외에도 ▲모 중앙일간지 고위인사가 YS 임기 중에 김현철을 제외한 전원을 석방할 것이라는 점을 회장께 보고하라며 각종 정보를 제공했고 ▲경쟁사인 타 언론사가 특정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건강문제를 치고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도 전달했다.
MBC 또한 이상호 기자가 22일 MBC 라디오 <뉴스의 광장>에 직접 출연, “테이프의 분량은 1시간30분 가량 되며 지난 97년 9월9일 당시 모 그룹 비서실장과 중앙일간지 사주가 정관계에 조직적으로 정치자금을 전달하려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소개했다.
이 기자는 “이 언론사주는 모 그룹 비서실장에게 당시 상황에 대한 보고를 하고, 여당후보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하는 방안 등을 논의했다”면서 “일간지 사주의 보고를 받은 모 그룹 비서실장은 회장님의 지시사항을 (이 사주에게) 전달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황희만 앵커가 “당시 여당후보라면 이회창 후보 아니었냐”고 묻자, 이상호 기자는 “그렇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이 기자는 이어 “녹취록에서 특징적인 것은 정관계 인사들에게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일종의 ‘배달부’ 역할을 한 것이 일간지 사주였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이 기자는 “(테이프에는) 주요정치인뿐만 아니라 당시 전현직 검찰 간부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전달해야 할 자금액수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다”면서 “지난해에 제공한 액수를 언급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조선>의 <중앙일보> ‘공격’
‘이상호 X파일’과 관련한 언론의 보도는 이후 정치권과 언론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번 보도는 <조선>이 지난 21일 첫 보도를 내면서 이뤄졌다. <조선>의 첫 보도는 언론계에 미묘한 파장을 낳았다. 왜냐하면 홍석현 주미 대사와 관련된 보도를 두고 양사의 신경전이 매우 미묘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지난 18일자 정치면에 ‘홍 대사 돌출행동 호기 놓칠 수도’라는 기사를 보도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조선>은 이 기사에서 한국에 유엔 사무총장 기회가 올 수 있는데 홍석현 주미대사의 때이른 출마선언으로 일이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은 19일자 “유엔총장 출마·주미대사 연계 홍석현 대사와 협의한 적 없어”라는 기사에서도 전날 보도 논조를 이어갔다.
당시 <조선>의 이런 보도태도에 대해 <중앙일보> 내에서는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는 불만을 토로하며 <조선> 홍아무개 기자의 취중 난동사건에 대한 자사 보도에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중앙>은 지난 15일자 사회면에 ‘조선일보 기자 ‘만취 소동’’이란 제목으로 홍 기자의 취중 행동을 자세히 보도했다.
특히 ‘대통령 친구’ ‘전라도XXX’ 등의 취중 언행을 상세히 전한 후 홍 기자가 한나라당 곽성문 의원의 음주 폭력행위에 대해 비판 칼럼을 쓴 일이 있다는 사실을 덧붙이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이날 관련기사를 내보내지 않았다. <중앙>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보도 이후 <조선> 관계자가 <중앙> 모 고위간부에 항의의 뜻을 전했다. <중앙>이 홍 회장 관련 보도에 의도가 개입됐다고 관측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중앙>의 한 기자는 “조선일보가 그동안 우리 회사와 관련된 보도를 얼마나 악의적으로 했느냐”며 “홍 대사와 중앙일보를 연결해 반사이익을 얻기 위한 의도”라고 주장했다. <중앙> 내부에서는 ▲홍석현 대사의 병역문제와 부동산 위장전입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고 한미정상회담 발표 ▲삼성 이건희 회장과 친인척 관계 강조 등 홍 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를 계속해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고위 관계자는 홍 대사 보도가 의도적인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렇게 하겠느냐. 하루 이틀 빨리 쓰고 늦게 쓰는 것은 기획기사가 있느냐 없느냐와 관련이 있다”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중앙>은 ‘침묵’으로 일관
이런 상황에서 이번 ‘X파일’과 관련한 <중앙>의 침묵은 언론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 22일자 신문들은 대부분 21일 MBC와 KBS가 보도한 이른바 ‘이상호 X파일’에 큰 비중을 두고 안기부의 과거 도청행위와 X파일의 주요 내용 등에 대해 자세하게 보도한 반면, <중앙>은 97년 대선직전 중앙일간지 사주와 재벌그룹 임원과의 대선자금 논의가 들어있는 도청테이프 내용과 관련해 지난 21일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홍석현 주미대사가 낸 가처분 소송 결과에 치중해 보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앙>은 MBC <뉴스데스크>와 KBS <뉴스9>의 불법도청 테이프에 녹취된 내용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반면, 법원의 가처분 일부인용 결정문에만 초점을 맞췄다. 특히 <중앙>은 2면 ‘법원, MBC 상대 방송금지 가처분신청 대부분 인용 “불법도청 내용 방송 말라”’에서 전날 서울남부지법이 ▲아나운서나 기자의 육성이나 자료화면·자막 등을 이용해 녹음테이프의 원음을 직접 방송하거나 ▲테이프에 나타난 대화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실명을 거론하는 방법으로 MBC 9시뉴스나 후속 프로그램 등을 통한 방송행위를 전면 금지시켰다며 “이 같은 보도행위를 인터넷 등에 게시하는 것도 할 수 없도록 했다”고 보도했다. <중앙>의 이 같은 보도태도는 언론계에 소유와 경영의 분리, 편집권의 독립 등 해묵은 화두와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안기부 X파일이 남긴 것
‘이상호 X파일’을 보도여부 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은 이후 언론계에도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개인의 명예훼손을 이유로 국민의 알 권리를 제한하는 법원의 방송금지가처분 결정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부터 녹취테이프의 불법성과 그 테이프에 담긴 보도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논쟁이 예상된다.
한 변호사는 “기자가 불법감청에 개입하는 등 취재과정이 불법적이었다면 문제가 되지만 녹취테이프를 입수한 것 자체는 불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보도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면서 “만일 녹취테이프 자체가 불법이라고 판단해 보도를 하지 않는다면 언론이 보도할 수 있는 고발기사나 폭로기사는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MBC 이상호 기자가 입수했다는 ‘X파일’을 둘러싼 논란은 안기부의 불법도청 문제와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일부 언론의 부적절한 개입이 있었는지가 핵심 쟁점이란 점에서 이후 정치권에도 상당한 파장이 일 전망이다.
불법 도청 못지 않게 주목해야 할 점은 1997년 대선에서 일부 언론과 굴지의 대기업이 어떤 행동을 했고 대선에 어떻게 영향을 줬는지를 규명하는 부분이라 점에서 이 문제가 새로운 ‘뇌관’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언론계 안팎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떠돌던 일부 언론의 ‘대통령 만들기’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호 X파일’이 과연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떤 모습으로 결론이 맺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민임동기 미디어오늘 기자 gom@med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