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전 대통령(오른쪽)이 한화갑 민주당 대표(왼쪽)에게 ‘정치 훈수’를 두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잠잠해진 ‘연정론’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 ||
그 내용은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느냐”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시점상 한 대표가 합당론에 대한 완강한 반대 태도를 보인 직후 나온 것이다. ’숨 쉬는 것도 정치’로 해석되어온 DJ의 급작스런 가르침이 내포하는 의미는 적지 않다. DJ는 과연 합당론을 지지하는 걸까. 그것이 지금 노무현 대통령과 여권으로부터 나오는 연정론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 DJ 연정에 울고 웃다
김 전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연정의 중요성을 아는 정치인이다. 연정의 아픔과 짜릿함을 모두 경험한 몇 안되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이미 15년 전인 1990년 1월에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이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하나가 된 3당합당이 있었다. 이때 노태우 정부로부터 첫 합당 제의를 받은 건 실은 평화민주당(평민당)의 김대중 당시 총재였다.
1989년 10월 미국 방문 직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네 가지의 연정 시나리오를 측근에게 제시하면서 공작을 주문했다. 이 중 첫 번째 안이 민정당과 평민당 간의 합당, 두 번째 안이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공화당 간의 3당합당이었다. 첫 접촉 대상이 된 DJ는 “정책연합은 몰라도 합당은 안된다”며 이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노태우 정권은 두 번째 안을 밀어붙였고, 이것이 3당합당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DJ가 체험한 첫 번째 연정 경험이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97년 이른바 DJP연합으로 일컬어지는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연합정권으로 김대중 정권이 탄생했다. DJ가 체험하고 주도한 두 번째 연정이었다.
자칫 한나라당 이회창 대권 후보와 김종필 총재 간 후보단일화가 이뤄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정권 획득 시 내각의 반을 떼어주겠다는 적극적인 대시로 두 사람의 후보단일화를 성사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는 DJP공동정권 또는 DJP연정으로 드러났다.
결국 첫 번째 연정에서 DJ는 권력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두 번째 연정을 통해 DJ는 권력을 얻었다. 연정에 울고 웃고 한 셈이다. 그 달고 쓴 맛을 아는 이가 바로 DJ이다.
# ‘김효석 효과’ 배워라
DJ가 한화갑 대표에게 훈수를 한 시점은 아직 연정 논의가 대대적으로 일어나기 직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DJ에게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의 합당 또는 통합은 언제나 최대 화두 가운에 하나일 것이 확실하다. DJ와 가까운 열린우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DJ는 자신으로부터 정치를 배운 사람들이 양당(열린우리당과 민주당)에 흩어져 있고 역사적으로는 그 두 당이 정통야당의 전통을 나눠 갖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두 당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 의원은 “DJ에게 두 당은 싸우는 형제일 뿐 남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 지난 1997년 대통령후보단일화에 합의한 후 악수하는 DJ(왼쪽)와 JP. | ||
당시 민주당 정세분석국은 “김효석 민주당 의원에 대한 교육부총리 제의가 민주당 당원들에게는 부정적이지만 호남지역의 일반여론에는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한 점이 있다”고 분석했다. DJ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내 또 다른 의원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은 갈등을 겪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사이가 좋지 않은 형제당이라는 게 호남인들의 정서”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은 이 점을 중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지난 4월 열린우리당의 지도부 경선 결과 문희상 신임 당의장을 포함한 상임중앙위원 5명 중 4명이 모두 민주당 출신으로 나타난 것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과의 합당론을 여전히 유효하게 만드는 토대 중 하나다. 문희상 염동연 장영달 한명숙 상임중앙위원이 모두 민주당 출신인데, 특히 경선 내내 민주당과의 합당론을 제기해온 염동연 후보가 ‘2위 득표’라는 기염을 토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민주당과의 합당에 반대해온 김두관 전 행자 장관이 지도부 진입에 실패한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 ‘큰 그림’ 볼 줄 알아야
정치 9단 DJ는 한 대표에게 ‘민주당의 재기’를 주문하고 있다. 실제로 한화갑 체제의 출범이 이탈한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세력을 재결집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특히 대의원들이 한 대표에게 몰표를 안겨줌으로써 한 대표는 강력한 지도력을 통해 신진인사 영입 등 외연확대에 적극 나설 전망이다.
하지만 한 대표 출범이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다는 게 일반의 평가다. DJ는 이 점을 중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DJ는 한 대표가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해 조금 더 융통성을 갖고 대하길 기대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한 대표가 민주당을 호남당에 국한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그나마 호남에서의 굳건한 지지를 지켜가는 데 버거워하고 있다는 판단이라는 것이다.
결국 민주당 재기의 관건은 호남지역 지지기반의 회복을 바탕으로 ‘탈호남정당화’에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DJ의 고민이 자리한다. DJ가 한 대표에게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느냐”고 질책성 훈수를 둔 것은 이런 점에서 좀 더 큰 그림을 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일부에선 “의례적 발언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DJ의 발언은 한 대표와 민주당이 어떻게 받아들이에 따라 잠잠해진 합당론이나 연정론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다시 생명력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정치권에서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