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0년 4월 당시 박철언 장관(왼쪽)과 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이 밀담을 나누고 있다. [91보도사진연감] | ||
특히 노태우 정권 당시에는 ‘6공화국의 황태자’라고 불릴 정도로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씨는 박 전 의원의 고종사촌누나다. 6공 시절 그는 청와대 정책보좌관과 정무장관, 체육부 장관 등을 지냈고 이후 국민당을 거쳐 자민련 부총재를 지냈다.
이처럼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과거사에 대해 침묵을 지켜온 박 전 의원이 마침내 폭포수처럼 입을 열었다. 자신의 정치역정 20여년을 담은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랜덤하우스중앙)을 발간,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 현대사의 중요 사건들의 감추어진 이면을 공개한 것이다. ‘박철언 X파일’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 회고록으로 인해 정치권은 또 한번의 풍랑을 맞고 있다.
그의 회고록에는 ▲3당 합당 전후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40억원+α’ 지원 사실과 YS와의 악연 ▲5공 말기의 친위쿠데타 기도 ▲김우중-이건희-신격호 등 재계 총수와의 인연 ▲DJ와의 개인적인 인연 등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권력 핵심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박 전 의원의 회고록 중 주요부분을 핵심 발췌했다.
YS에게 건넨 ‘40억원+α’
박 전 의원의 회고록 중 가장 큰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1990년 3당 합당을 전후한 시기에 YS에게 직접 전달된 ‘40억원+α’와 관련된 부분. 회고록은 세 차례에 걸쳐 돈이 전달된 것으로 밝히고 있다.
“1989년 5월30일 저녁 8시50분. 상도동 김현철의 아파트에서 김영삼 총재를 만났다. 다음날 있을 노(태우) 대통령과의 면담에 대비하여 사전 조율하는 차원에서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날 김영삼 총재에게 20억원과 여비(YS의 소련 방문) 2만달러를 전달했다. 김영삼 총재는 “이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부담감을 느끼는데”라면서 “앞으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혁명적인 일입니다”라고 화답했다.
1989년 12월20일 저녁 상도동 김현철의 아파트 내실에서 김영삼 총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YS에게 노 대통령의 연말 성의를 전달했다. 1천만원짜리 수표 1백 장으로 도합 10억원이었다. 김 총재는 “믿으니 받는 겁니다”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3당 합당 발표 이틀 뒤인 1990년 1월24일 저녁 9시30분 상도동에서 김 총재를 만났다. 설 연휴를 앞두고 대통령이 전달하라고 한 10억원을 건네주었다. 김 총재는 “대통령께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세요. 그런데 (백담사에 가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구정 후에 곧 서울로 귀환한다는 풍설이 있는데 시기적으로 봄이 지나고 오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며 “JP를 조심해야 합니다. 박 장관이 나와 대통령 사이에 신의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세요”라고 했다.”
회고록에 등장하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 회고록은 자신에 대한 기록인 만큼 ‘선택적 사실’만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가 일각에서 박 전 의원이 밝힌 ‘40억+α’를 놓고, 결국 YS정권 당시 이른바 ‘슬롯머신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박 전 의원의 YS에 대한 ‘복수혈전’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 전 의원 자신은 회고록에서 “야당 총재나 여야 정치인에게 은밀히 정치자금을 주는 최고 통치권자의 심부름을 여러 차례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런 일들 모두를 일일이 기록에 남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는 역사 앞에 진실이 공개되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 빠졌을 때는 그 당시 수표 번호 등 돈의 출처를 분명히 메모해 두었다. 이것은 그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 지난 86년 9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왼쪽)은 직접 비상계엄을 지시했다고 한다. 사진은 지난 99년 박철언 전 의원 장녀 결혼식에서 만난 두 사람. | ||
“민주화시위가 격렬하던 1986년 9월26일 전두환 대통령은 직접 비상계엄 준비 지시를 내렸다. 전 대통령은 ‘불순한 국회의원을 검거하여 군법에 회부하도록 서울, 수원 등 지역별로 군법회의 설치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일선에서의 활동은 경찰이 하도록 하고 군인은 시설을 점령하고 위엄을 보이면 된다. 중앙청 앞에 탱크를 배치해서는 안 된다. 하루만 보이고 그 다음날부터는 은폐하도록 하라’는 등의 구체적인 지침도 내렸다.
또 10월22일에는 장세동 안기부장을 통해 전 대통령의 구체적 지침이 전달됐다. 전 대통령이 정한 비상조치 날짜는 11월7일. ‘11월4일 미국 중간 선거 결과를 보고 난 후에 11월7일쯤이 좋겠다. 내년 2월까지 끌고 가서 2월 중에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그때 계엄을 해제하면 된다’는 지시가 함께 내려왔다.
전 대통령은 10월30일에는 ‘김영삼, 김종필은 갑근세도 안 내고 있는데 탈세 혐의로 입건 가능한지 검토하라. 김영삼, 김대중의 연행은 보안사에서 하고, 수사는 안기부에서 하라.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을 우선 막아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연말까지 더 이상의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대법관 후보 면접과 이회창
“1981년 3월부터 전두환 대통령 지시로 대법원장 후보들의 ‘면접시험’을 봤다(당시 박 전 의원은 서울지검 검사 신분을 유지한 채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대법원장 후보였던 유○○ 판사는 ‘각하께서 대법원장 후보의 한 사람으로 생각해주시는 것만도 영광이다’고 했고, 김○○씨는‘대임이 주어진다면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정부에 협력토록 하겠습니다’고 했다.
1981년 4월에는 대법원 판사(현 대법관) 후보들을 서울 하얏트호텔로 차례로 불러 면접시험을 봤다. (나는) 당시 45세의, 일선 법원장 경험도 없던 이회창 법원행정처 기획실장을 전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건의해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도록 했다.”
1982년 DJ와 전두환
1980년 5월 쿠테타로 사실상 집권에 성공한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를 내란음모죄로 구속했다. 김 전 의원은 같은 해 9월 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해인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감형(무기, 20년형) 끝에 이듬해인 1982년 12월 김 전 의원은 석방되어 미국으로 두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후보의 미국에서의 행적에 대해 ‘그는 국회의원이 될 자격도 없다. 미국으로 갈 때는 정치에서 손떼고 건강에 유의하며 살겠다고 내 앞에서 각서까지 쓰고 (해서) 7만~8만달러까지 환전시켜주어 내보냈다. 그랬으면 조용히 1년쯤이라도 지내다가 나에게 기자들이 거듭 인터뷰 요청을 해서 부득이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편지라도 한 장 쓰고 정치활동을 했다면 약속을 지키는 인물이 될 텐데 그는 머리 나쁜 선동자에 불과하다’며 불쾌해 했다.”
시인 김지하씨는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의 1982년 도미와 관련, 당시 노신영 안기부장을 만나 들었던 대화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김씨는 회고록을 통해 노 부장이 “김대중씨 잘 아시지요? 애국하는 방향이야 각기 다르니 뭘 따지겠습니까마는 요즘 나라의 외환 사정이 매우 나쁩니다. 그런데 자기 동산 전체를 달러로 바꿔주지 않으면 (김대중씨가) 미국으로 가지 않겠다고 해요. 그래서 바꿔는 줬습니다만 웬 돈을 그렇게도 많이 가지고 있는지? 그걸 모두 달러로? 조금 서운했습니다”라고 말한 사실을 밝혔었다.
박 전 의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도미 당시 전두환 정권이 환전해준 DJ의 동산은 7만~8만달러 수준이었던 셈이다.
강재섭 의원과의 ‘악연’
“1980년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일할 당시 전 대통령의 ‘비민주적이고 불합리한 모든 현행 법령을 고치는 법제 개혁 작업을 주도하고 대통령의 법무참모 역할을 해 달라’는 당부를 받고 법제연구반을 꾸렸다. 그리고 이 곳에서 사법고시 8회 동기인 이순영 판사를 통해 광주지검에서 일하던 강재섭 검사를 처음 소개받았다.
1985년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강 검사는 나의 참모장 역할을 했다. 1988년 청와대 정책보좌관에 임명된 후 보좌관실의 비서관 4명을 인선했는데 처음에는 1980년 청와대 비서관 시절부터 계속 참모장 역할을 해온 강 검사에게 그 역할을 맡기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강 검사가 몇 차례에 걸쳐 ‘형님! 꼭 정치를 해보고 싶습니다’라며 전국구 국회의원을 시켜달라고 졸랐다.
…1992년 10월13일 민자당 탈당을 하루 앞두고 아침 일찍 대구로 향했다. 커다란 정치적 결단을 하면서 나를 국회의원에 뽑아준 지역의 핵심 동지들과 상의하는 것이 예의였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강 의원이 찾아왔다. 양재동에서 김포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강 의원은 ‘형님, 형님이 내일 먼저 탈당하시면 저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바로 탈당을 결행하겠습니다’라고 거듭 약속했다. 1980년 청와대 법제연구반 시절부터 12년 동안 참모장 역할을 맡겨온 그였기에 모든 것을 터놓고 상의했고 또 나는 그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탈당 선언을 하고 난 다음날인 10월15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강재섭이 아침에 민자당 기자실로 내려와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지금은 당이 단합해야 할 시점이며 탈당은 명분이 없는 일이다’고 잔류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더니 믿는 사람으로부터 뒤에서 칼질당하는 비참한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