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삼(왼쪽),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안기부 불법도청 파문으로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자 정치권 내 범 YS-DJ계 인사들이 ‘옛 주군 구하기’를 위해 결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상대방을 향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양측의 행보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 ||
70~90년대 끊임없이 협력과 경쟁을 반복했던 ‘양김’(兩金)은 이번 ‘X파일’ 사태로 그동안 정치인생에서 쌓아왔던 명예와 업적이 송두리째 흔들릴 위기를 맞게 됐다.
YS의 경우 이미 차남 현철씨와 최측근인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재임 시절 안기부 내 불법도청팀인 ‘미림’의 재건에 깊숙이 관여했을 것이란 정황이 포착됐고,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던 DJ는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DJ정권 출범 후 4년간이나 불법도청을 했다”는 국정원의 ‘고해성사’에 충격을 받아 아예 병원에 입원한 상태다.
이미 정치역정의 정점인 대통령직에서 각각 98년, 2003년 퇴임해 직접적인 정치력 발휘가 어려운 ‘양김’이지만 막상 위태로운 처지가 되자 두 사람과 이래저래 인연을 맺은 정치권 인사들의 움직임은 아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X파일 사건의 파장이 초기 YS정부에서의 불법도청에서, 국정원 중간조사 발표(5일) 이후 DJ정부 시절로 옮아가면서 양대 세력 간에 서로를 직·간접적으로 비판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우선 ‘범 동교동계’로 불리는 DJ 측근들은 DJ가 폐렴 증세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10일)하면서 소속 정당·당파를 떠나 ‘동분서주’하고 있다. 특히 X파일 사건의 파장이 전방위로 확대돼 노무현 대통령과 DJ 간에 급격히 한랭전선이 형성되면서 양대 정권에서 연이어 요직을 맡았던 측근들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인 상황이다.
현 여권 핵심부에 DJ계열 인사로 분류되는 인사들은 열 손가락으로 꼽기가 어려울 만큼 많다. 열린우리당엔 핵심부 대부분이 DJ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당장 문희상 의장은 동교동 비서 출신에 80년대엔 DJ의 청년전위대인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를 결성해 초대 중앙회장을 맡았고, DJ정권 시절엔 청와대 정무수석과 국정원 기조실장을 지냈다.
역시 연청 회장을 지낸 정세균 원내대표와 동교동 비서 출신인 배기선 사무총장도 수뇌부에 포진해 있다. 지난 4월 전당대회 지도부 경선에서 2위를 차지했던 염동연 의원도 연청 사무총장을 지내는 등 동교동계에서 잔뼈가 굵었고, 전병헌 대변인도 DJ정권에서 청와대에서 근무해 측근 그룹에 속한다.
관계에선 이해찬 총리가 80년 당시 신군부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함께 옥고를 치른 후 옛 국민회의·민주당 시절 정책위의장만 세 번에 교육부 장관을 지낼 만큼 DJ로부터 남다른 총애를 받았던 이력을 갖고 있고, 지난 11일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DJ를 찾아간 전윤철 감사원장은 DJ정권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과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다.
▲ (왼쪽부터) 문희상 의장, 정세균 원내대표, 배기선 사무총장, 염동연 의원 | ||
문 의장은 “DJ가 불법도청과 고문, 정치사찰 등 독재정권 치하에서 조직적이고 범국가적으로 이뤄지던 반민주적·반인권적 관행을 근절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한 분인가를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병문안을 하려다 “퇴원 후에 보자”며 거절당한 문 의장은 DJ가 병원 문을 나서는 대로 동교동 자택으로 찾아가겠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할 만큼 옛 주군의 불편한 심기를 달래는 데 부심하고 있다.
입원 직후 병원에서 휠체어에 앉은 DJ를 복도에서 만나 “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던 배 총장도 “어떤 경우에도 열린우리당, 특히 DJ를 모셨던 우리들은 (DJ의) 명예를 반드시 지켜내겠다.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지만 진상규명을 통해 반드시 DJ의 명예를 지켜나가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조직적으로 ‘DJ 구하기’에 나서려는 움직임도 서서히 구체화되고 있다. 40년 넘게 DJ와 ‘호형호제’해온 사이인 이용희 의원과 배 총장, 전 대변인 및 DJ 밑에서 오랜 기간 부대변인을 지낸 김현미 의원 등 당내에서 ‘DJ 직계’로 분류되는 의원 12명은 12일 긴급회동을 가져 대책을 숙의했다. 이들 중 일부는 국정원의 ‘섣부른’ 발표와 노 대통령의 X파일 관련 기자간담회(8일)가 DJ는 물론 호남 민심을 괜스레 자극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 대변인은 “DJ는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적 자산으로 마땅히 존중되고 존경받을 업적과 치적을 낸 분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말했고, 다른 한 의원은 “DJ 업적이나 국민의정부 업적이 가려지고 상황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의견들이 많다”고 분위기를 소개하기도 했다.
‘DJ의 적통(嫡統)’를 자부해온 민주당에 몸을 담고 있는 DJ계열 인사들도 이른바 ‘병상(病床) 정치’가 본격화되면서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오랜 기간 DJ의 비서생활을 했으며 ‘리틀 DJ’로까지 불리는 한화갑 대표 등 현역 의원들은 물론이고 박상천 장재식 윤철상 이훈평 조재환 전 의원 등 2004년 4·15 총선에서 낙선한 후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던 측근들도 앞다퉈 병문안을 하며 향후 대응책을 모색하고 나섰다. 또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온 박지원 전 청와대비서실장도 11일 장시간 DJ를 면담해 눈길을 끌고 있다.
▲ (왼쪽부터) 김무성 사무총장, 이규택 최고위원, 이재오 의원, 김문수 의원 | ||
YS계열에선 김무성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포문을 열었다. 상도동계 가신(家臣) 출신으로 YS정권 초기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지냈고, YS의 차남 현철씨와 각별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진 김 총장은 도청과 관련한 도덕적 비난이 YS에 집중되던 지난 2일 느닷없이 “우리가 자체적으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X파일’에 열린우리당의 모(母) 정권인 국민의정부 시절의, 전 국민이 경악할 엄청난 사건이 담겨 있다. 역대 정권에서 불법도청 행위가 있었고 현 정권에도 있는 걸로 안다”고 말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김 총장은 당시 열린우리당은 물론 민주당의 “근거를 대라”는 요구에 대해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며 입을 닫았다.
김 총장의 발언은 YS 부자에 쏠린 도청 관련 비난을 ‘물타기’하려는 의도란 비판을 받았지만, 사흘 뒤인 5일 국정원이 “DJ정권 시절에도 도청이 있었다”고 밝히면서 새롭게 주목을 받았다. 국정원 발표 이후 한결 여유를 갖게 된 김 총장은 “그동안 국회에서 정부기관의 불법 도·감청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왔는데 부인으로 일관하던 국정원이 늦게나마 진실을 밝혀 다행이다. 한나라당은 국정원의 발표 내용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실체적 진상규명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원 개편을 둘러싼 정치권 논란에서 YS계열 인사들이 ‘해체론’을 적극 주장하고 나선 배경을 놓고도 설왕설래가 적지 않다. 현행 국정원을 해체하고 대외정보를 전담하는 해외정보처를 신설하는 것이 요지이지만 이면에는 이번 도청 파문에 대한 관심을 DJ정권하 국정원 시절로 몰아가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는 것이 정치권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실제 해체론엔 가장 강경한 입장을 펴고 있는 이규택 최고위원을 비롯,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안상수 심재철 의원 등 YS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인사들이 중핵을 이루고 있다. 4선의 이 최고위원은 YS가 이끌던 민추협에서 대외협력국장 등을 지내는 등 상도동과 오랜 인연을 갖고 있다.
또 재야·노동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이재오 김문수 의원, 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냈고 MBC에서 노조활동으로 구속된 바 있는 심재철 의원, YS정권 초기 슬롯머신 사건 담당 검사로 박철언 전 의원 등을 구속시켰던 홍준표 의원, 검사 시절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담당하며 진실규명에 역할을 했던 안상수 의원 등은 모두 96년 4월 15대 총선에서 당시 신한국당 총재였던 YS가 공천을 주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특히 당시 공천 작업은 YS의 차남 현철씨가 사실상 주도했고, 현철씨가 ‘개혁 공천’을 내세워 이들을 대거 수도권에 출마시킨 내막을 아는 정치권에선 한나라당 내에서 ‘국정원 해체론’이 확산되고 있는 배경과 양측 간의 특별한 인연을 거론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정가에서는 향후 도청 파문이 어느 방향으로 ‘진화’하느냐에 따라 DJ와 YS의 측근들의 움직임도 정도와 궤를 달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양 진영이 서로를 향해 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울 수도 있고, 두 진영의 화살이 함께 현 노무현 정부를 향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양김은 정계를 떠났지만 그들의 그림자는 측근들의 등 뒤에 아직도 드리워져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