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원칙주의자 여기저기서 “우리편”
당초 파격적인 진보적 재야 변호사가 대법원장으로 오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했던 법원은 대법관 출신이 지명되자 가히 ‘축제’ 분위기다. 한나라당 등 일부 보수 세력은 이 지명자가 지난해 대통령 탄핵심판 변호인단에 참여했다는 점을 들어 시비를 걸고 있지만 속내는 그나마 무난한 인물이 됐다고 안도하는 분위기다. 이번 기회에 ‘보수의 아성’인 대법원을 뒤바꿔 놓을 개혁적 법조인을 바랐던 시민단체와 재야 변호사 단체는 ‘실망스럽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진보세력도 이 지명자가 대법관 출신으로서는 상대적으로 개혁성향이 높다는 점을 감안, 과격한 ‘비토 투쟁’에 나설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면서 법원이나 보수세력, 진보세력 모두 이 지명자가 자신들의 뜻에 맞는 방향으로 대법원을 이끌어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 지명자의 ‘무난한’ 성향을 놓고 각자 ‘아전인수’식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 지명자는 최종적으로 누구의 편을 들어줄까. 일단은 겉으로 드러난 그의 품성과 과거 전력 등을 토대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청와대가 지난 18일 이용훈 차기 대법원장 지명을 공식 발표하기 1주일여 전부터 각 언론에는 “이용훈씨가 내정됐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대법관 출신인 데다 개혁성향까지 갖추고 있어 일찌감치 차기 대법원장 후보 ‘0순위’로 꼽혀온 것이다.
이 지명자는 법관 시절, 노동이나 시국사건 등에서 일부 개혁적 판결 성향을 보여줬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이 지명자를 ‘개혁주의자’라기보다는 ‘깐깐한 원칙주의자’로 보고 있다. 그의 이 같은 모습은 차기 대법원장으로 공식 지명되던 18일 하루 동안의 행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청와대의 공식지명이 예정돼 있던 이날 많은 언론사 사진기자들은 오전에 이 지명자의 사진을 찍기 위해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 내에 있는 이 지명자 개인 변호사 사무실로 몰려갔다. 청와대 공식 발표가 오후 늦게 이뤄지는 것으로 계획돼 석간이나 조간신문 모두 마감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사진을 미리 찍어놓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지명자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간 사진기자들은 맥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 지명자가 절대로 변호사 사무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지 않겠다며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다. 사진기자들은 변호사 사무실 직원으로부터 ‘이 지명자의 언론과의 접촉은 청와대 공식 발표가 예정된 오후 4시 이후 충정로에 있는 자택에서 이뤄진다’는 얘기와 함께 자택 약도를 받아들고 철수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언론뿐만 아니라 차기 대법원장을 모셔야 하는 대법원 관계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미리 대법원 현안에 대해 기본적인 보고를 하고 향후 국회 청문회 준비를 의논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려는 대법원 관계자들은 오전 일찍부터 이 지명자와 접촉,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극구 사양했다. 역시 청와대 공식 발표 이후 자택으로 오라는 답변이었다.
이는 대법원장이라는 자리가 단순히 법원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법조계 전반을 이끌어갈 구심점이라는 점에서 사사로이 개인 변호사사무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이 지명자의 고집 때문이었다.
특히 이 지명자는 청와대 공식 발표가 나기 전까지는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언론이나 대법원과의 접촉을 하지 않겠다며 자택에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그는 오후 4시 청와대 공식발표가 나기 전까지 측근 변호사의 권유로 하루 종일 차안에서 시내 드라이브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에피소드는 이 지명자가 얼마나 깐깐한 원칙주의자인가를 보여주는 한 예다.
이용훈 지명자의 품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는 그의 법관 시절 별명인 ‘벙커’다. 벙커라는 법원 내의 별명은 골프의 벙커에서 유래한 것으로, 벙커에 골프공이 빠진 골퍼들이 하나같이 모두 곤혹스러워하듯 후배 법관들이 어려워하는 깐깐한 부장판사를 의미한다.
실제 그는 과거 고등법원 부장판사 시절 배석판사들이 1심 판결문을 조금 고치는 방식으로 2심 판결문을 만드는 관행을 금하고 철저히 판결문을 새로 써 내라고 요구하면서 ‘벙커’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기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당일 자택에서 이뤄진 기자회견에서 ‘벙커’라는 별명에 대해 질문한 기자들에게 이 지명자는 “나와 같이 근무한 후배들은 벙커라고 하지 않는데 근무 안한 법관들이 벙커라고 부른다”며 “누구 말이 맞겠냐”고 받아치기도 했다.
이 같은 예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 지명자가 철저한 원칙주의자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이에 따라 지난해 사법개혁위원회와 올해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로 이어져 오는 로스쿨, 국민참여재판, 공판중심주의 도입 등 일련의 사법개혁 방안들에 대해서도 원칙에 충실, 밀어붙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진행되는 사법개혁의 방향에 대해 검찰은 물론 법원 일각에서도 불안과 불만의 목소리가 있지만 사법개혁이라는 원칙이 세워진 이상 이 지명자가 드라이브를 걸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이 지명자가 과거 김영삼 정권 시절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첫 번째 사법개혁 작업을 주도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번 사법개혁 방안들을 마무리하는 데 적임자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문제는 오는 10월부터 시작되는 ‘대법관 대거 교체’에서 이 지명자가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는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는 점이다. 신임 대법관들이 어떤 인물들로 채워지느냐는 사법제도의 개혁 못지않게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 대법원은 오는 10월과 11월 4명의 대법관이 임기 교체되고 내년 7월에는 5명이 한꺼번에 바뀌는 등 대대적인 개편을 앞두고 있다. 새 대법관들은 형식적으로는 국회 인준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그 전에 대법원장이 임명제청을 하기 때문에 사실상 대법원장이 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보세력은 그동안 법원장 등 고위 법관들이 독식했던 대법관 자리를 이번 기회에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변호사들에게도 상당부분 할애해 대법원이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과 이해관계를 반영토록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법원 내부는 물론 보수세력들은 과거와 같이 법원 관료조직 내에서 착실하게 성장한 보수적 법관들이 대법원을 계속 지켜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 같은 상반된 요구에 대해 이 지명자는 오는 10월 처음으로 행사하는 신임 대법관 임명제청을 통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새 대법원장에 대한 우리 사회 각 세력의 ‘아전인수’식 해석이 얼마나 맞아떨어졌는가를 가름해 주는 바로미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진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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