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벌어진 공릉동 다가구주택 현장. 화살표 쪽으로 따라가면 양 씨의 집이 나온다. 양 씨와 숨진 박 씨는 최근 살림을 합친 예비 신혼부부로, 결혼식 준비 과정에서 예비신부 박 씨가 휴가 나온 장 상병에게 살해당했다.
지난 30일, <일요신문> 취재진과 만난 사건 현장 주민 A 씨는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한 뼘이 족히 될 듯한 선명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머리에 피가 많이 나온다고 뭐 하나 가져다달라고 해서 내가 화장지를 갖다 줬다”며 “그 사람 목엔 상처가 없었지만 피를 많이 흘렸다. 가까스로 몸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고 전했다. 여기서 ‘그 사람’은 바로 양 씨. 사건 직후 양 씨를 최초 목격한 A 씨는 사건 직전의 장 상병을 보기도 했다. 그는 아찔했던 그날의 기억을 천천히 떠올렸다.
A 씨는 출근을 위해 언제나 그렇듯 새벽 5시에 일어났다. 그날따라 이상한 소리가 들려 베란다 밖으로 눈을 돌렸는데 뜻밖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의문의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던 것. A 씨는 “3층에서 다 보였고 다 들렸다”며 “너무 이상해서 그 젊은 친구를 찾으러 내려왔는데 안 보였다”고 설명했다. 그 남자가 바로 박 씨를 죽인 장 상병이었다. 그는 꺼림칙한 기분 탓에 골목길에서 서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끼아아아악!”
오전 5시 30분경 미명을 깨뜨리는 외마디 비명이 평온한 주택가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A 씨는 “여자 비명소리가 아주 컸다”며 “동네 전체에 울려퍼졌다”고 했다. 바로 옆 빌라 3층에 살고 있는 B 씨도 소리를 듣고 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었고 길 아래 A 씨와 눈이 마주쳤다. 집 밖으로 나온 B 씨와 A 씨는 소리가 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6~7가구가 살고 있는 다세대주택 쪽이었다. A 씨는 “불 켜진 반지하 집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며 “깊숙이 들어가 봤는데 좌측에 통로가 있었다”고 밝혔다.
“아이고 다 죽었다. 안에 있는 사람 다 죽었어…. 다 죽었어….”
두 사람이 통로를 돌아 철문에 다다른 순간, 양 씨가 갑자기 문 밖으로 튀어나왔다. 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양 씨는 A 씨에게 “그 사람이 여자친구를 죽였다. 나도 칼로 찌르려고 해서 다 죽였다”며 집 앞 골목길에 털썩 앉았다. 약 20분이 흐르자 경찰이 도착했다. 동네 주민들도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맨 오른쪽에 장 상병을 찌르고 나와 주택 앞 골목길에 주저앉은 양 씨. YTN 보도 화면 캡처.
양 씨와 박 씨는 예비 신혼부부로 최근에 살림을 합쳤다고 한다. 결혼식 준비 과정에서 예비신부가 살해를 당한 것이다. 양 씨는 사건 직후 경찰과 이웃주민들에게 “전화기 좀 가져다주세요. 처갓집에 전화를 해야 하는데…”라고 부탁했다. 그는 휴대전화를 들고 “놀라지 마세요. 빨리 올라오세요. 여자친구가 죽었어요”라며 다급한 목소리로 어디론가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경찰은 장 상병의 시신을 작은 방에서 발견했고 박 씨의 시신을 거실에서 수습했다. 양 씨에 대해서는 살인 혐의를 적용해 불구속 입건했다. 양 씨는 경찰 조사에서 “장 상병을 처음 봤다”며 “비명소리를 듣고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한 남성이 방안으로 밀치고 들어와 흉기로 나를 찔렀다”고 진술했다. “몸싸움 끝에 흉기를 빼앗아 상대방의 옆구리 쪽을 찔렀다”고도 보탰다. ‘정당방위’를 주장한 것. 경찰에 따르면 그는 이마 부분을 흉기에 찔렸고 왼쪽 손가락이 베여 인근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경찰 조사를 토대로 재구성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강원도 고성 육군 ○○사단에 복무 중인 장 상병은 9월 22일 정기 휴가를 맞아 큰아버지 등 친지가 있는 공릉동으로 휴가를 나왔다. 23일 저녁 8시경 친구 박 아무개 씨(19) 등과 만나 인근 대학 축제에 놀러갔다. 장 상병은 친구들과 함께 다음날 새벽 4시 50분까지 편의점과 술집을 돌며 소주 3병을 마셨다. 서울시 노원구 월계동에서 “누굴 좀 만나야겠다”며 박 씨와 헤어진 그는 공릉동으로 향했다.
장 상병은 공릉동에 도착하자마자 인근 주택의 유리창을 부수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또 다른 주민 C 씨는 “중국집 뒤편 떡볶이 가게 지하 유리도 깼다”며 “가게 지하에 살던 몽골인들이 소리를 지르자 장 상병이 도망갔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장 상병은 다른 가정집에 들어가 문고리를 붙잡고 돌리거나 유리창을 깨뜨리다 손을 다쳐 편의점을 찾았다.
당시 편의점에서 근무한 D 씨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5시 9분쯤에 (장 상병이) 편의점으로 들어왔는데 술 냄새가 좀 많이 풍겼다”며 “손이 피범벅이 된 채 들어와서 응급밴드를 찾았다”고 전했다. 5시 28분경 장 상병은 현관문이 열려 있던 양 씨 집으로 거리낌 없이 들어갔다. CCTV에 찍힌 장 상병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당시 장 상병의 손엔 흉기가 들려있지 않았다. 10분 뒤 장 상병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10월 2일 현재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흘렀지만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먼저 장 상병이 그 시각 양 씨의 집으로 들어갔던 이유가 확실치 않다. 경찰이 장 상병과 박 씨, 양 씨의 1년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살폈지만 장 상병이 박 씨나 양 씨와 연락을 주고받은 기록은 없었다.
경찰 관계자는 “장 상병의 우발적 살인으로 보고 있다. 현재까지 장 상병과 나머지 두 사람이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장 상병이 양 씨 집뿐만 아니라 수차례 다른 집으로 침입하려 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평소 정신병력도 없었고 관심병사도 아니었던 장 상병이 생면부지의 박 씨를 상대로 ‘묻지마’ 범행을 일으켰다는 점은 여전히 의문이다.
박 씨가 비명을 지른 ‘시점’도 미스터리다. 집 안 거실에서 장 상병의 인기척을 느끼는 순간 박 씨가 소리를 질렀을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웃 주민들은 <일요신문>에 “장 상병이 들어간 뒤 5분이 지나고 찢어질 듯한 소리가 났다”고 했다. 장 상병이 흉기로 자고 있는 박 씨를 위협한 뒤 손으로 입을 막고 박 씨가 비명을 지르자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비명 ‘횟수’에 대해서도 엇갈린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이웃 주민들은 “비명은 한 번 들렸고 한동안 아무 기척도 나지 않았다”며 “격투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에 대해 경찰은 “답을 해줄 수 없는 부분이다. 악 소리를 한 번 했다, 두 번 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분석 결과 박 씨의 시신에서 흉기로 10차례 찔린 흔적이 발견됐다. 박 씨가 흉기에 10여 차례 찔리는 동안, 주변에 비명이 단 ‘한 번’밖에 들리지 않은 것. A 씨도 장 상병과 양 씨가 ‘혈투’를 벌이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유일한 생존자인 양 씨의 행동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없지 않다. 양 씨는 사건 직후 장 상병이 들어올 때 흉기를 가져왔다고 경찰에 진술했지만 흉기는 집안에 있던 것이었다. 경찰은 “처음엔 양 씨가 처음 본 칼이라고 했지만 나중에 우리가 똑같은 칼을 주방에서 찾아냈다”며 “찾아내서 보여주니까 양 씨가 ‘내가 잘 못 봤지만 그 집에 들어온 지가 1년 다 돼간다. 여자친구가 산 걸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이 사건의 키는 양 씨가 쥐고 있다. 경찰 역시 양 씨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진상을 파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찰은 결국 양 씨에 대해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진행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경찰은 “양 씨의 진술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조사 계획 잡았다”며 “사건을 본 사람이 양 씨밖에 없다. 정황증거 수집을 위한 절차다”고 말을 아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
‘최후의 목격자’ 편의점 직원 인터뷰 “여자 이름 부르며 그집으로 들어갔다” 사건 당일 새벽 골목길을 돌며 난동을 피운 장 상병은 5시 9분경 양 씨 집 인근 편의점에 들렀다. 당시 편의점에서 근무한 D 씨는 장 상병과 약 3분 동안 대화를 나누었고 장 상병이 양 씨 집 쪽으로 사라지기 직전까지 장 상병을 지켜봤다. <일요신문>은 D 씨를 전화 인터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편의점 CCTV에 찍힌 편의점 직원(왼쪽)과 손에 피를 흘리고 있는 장 상병 모습. ―장 상병의 상태는 어땠나.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는데 편의점 앞에서 장 상병이 손에서 피를 흘리며 ‘이 정도면 병원 가야겠죠?’라고 물어서 ‘병원 가야죠’라고 대답했다. 장 상병이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 ‘일단 피를 흘리니까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세요’라고 했다. 그리고선 나를 따라 들어왔다.” ―장 상병이 술에 얼마나 취한 것 같았나. “처음 봤을 때는 만취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가까이 와서 얘기할 때 술 냄새가 많이 났다. 좀 취하긴 한 것 같은데 몸을 못 가눈다거나 이러지는 않았다. 존댓말을 계속 썼지만 완전히 맨 정신인 사람처럼 얘기하진 않았다.” ―편의점 안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나. “그 친구가 응급밴드를 찾았다. 밴드를 꺼내 보여주며 ‘크기가 가장 큰 게 이거다’고 하자 장 상병이 ‘작을 거 같아요. 다른 건 없어요?’라고 되물었다. 피가 떨어지려고 해서 그에게 나가서 얘기하자고 말한 순간, 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장 상병이 ‘아, 어떡하죠?’라고 하자 내가 닦겠다고, 가만히 놔두라고 했다. 핏자국을 닦은 뒤 나가보니 장 상병이 여전히 편의점 앞에 있어서 ‘병원을 빨리 가보세요’라고 했다. 장 상병은 ‘치료할 수 있는지 좀 더 알아볼게요’라며 편의점을 떠났다.” ―양 씨 집 쪽으로 가기 직전의 장 상병 모습은 어땠나. “편의점 오른편 길 쪽으로 30m쯤 걸어가다가 주차된 승합차 뒤쪽으로 들어갔다. 차 뒤에서 구토를 하는 줄 알았는데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집이었다. 이 친구가 일부러 액션을 취한 건지 모르겠는데 ‘○○아’라며 누구 이름을 계속 부르면서 양 씨 집으로 들어갔다. 좀 희한했다. 분명 여자 이름 같았는데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엔 술김에 여자친구랑 싸웠거나 여자가 먼저 앞으로 가고 있으니까 장 상병이 그 여자를 뒤에서 불렀다고 생각했다.” [선] |
양씨의 정당방위 가능성 “칼 아닌 다른 수단으로 저지했어야” 경찰은 현재 양 씨의 정당방위 가능성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양 씨는 “사건 당일 작은 방에서 문을 닫고 자고 있었다”며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는데 장 상병이 갑자기 방문을 밀치고 들어와 흉기를 휘둘렀다”고 밝혔다. 양 씨는 장 상병의 칼을 빼앗아 옆구리를 찔렀다. 경찰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장 상병은 두 군데 찔렸다. 시신에 격투 흔적은 없었지만 꼭 싸웠다고 흔적이 몸에 남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정당방위가 인정되기 어렵다. 박 씨가 살해된 뒤 양 씨가 생명에 위협을 느껴 장 상병의 칼을 빼앗아 살해한 경우는 정당방위의 요건 중 ‘상당성’이 결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안에서 상당성 요건을 충족하려면 방위에 적합한 수단 중에서 침해자에게 가장 경미한 손실을 입히는 걸 선택했어야 했다. 즉 양 씨가 칼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장 상병의 공격을 저지했어야 했다. 물론 칼 이외에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경우라면 재판 과정에서 참작될 수는 있다.” 법원도 유사한 사건에서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칼을 들고 피고인을 찌르자 그 칼을 뺏어 그 칼로 반격을 가해 피해자에게 상해를 입게 하였다고 해도 정당방위는 성립하지 않는다”며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로서 상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고 판결했다. 하급심인 고등법원 역시 “부당한 공격에 대응해 피고인이 피해자의 손목을 비틀어 칼을 뺏은 다음,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피해자의 등과 가슴부분을 여러 번 찔러서 살해한 행위는 상당성이 없다”며 “정당방위나 과잉방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했다. 양 씨가 박 씨의 죽음을 확인하고 ‘분을 풀 목적’으로 장 상병을 공격했다면 어떨까. 앞서의 변호사는 “양 씨가 자신의 생명에 대한 침해가 없거나 그 상황을 벗어났는데도 분을 풀 목적으로 장 상병에게 공격을 가했다면 더더욱 정당방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침해행위에 대하여 자기의 권리를 방위하기 위한 부득이한 행위가 아니고, 그 침해행위에서 벗어난 뒤 분을 풀려는 목적의 공격행위는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하고 있다. 물론 양 씨의 형이 감경되거나 면책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형법 제21조 2항은 “방위행위가 그 정도를 초과한 때에는 정황에 의하여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며 ‘과잉방위’를 명시하고 있다. 또 제21조 3항은 “전항(2항)의 경우에 그 행위가 야간 기타 불안스러운 상태 하에서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으로 인한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면책적 과잉방위’다. 앞서의 변호사는 “아직 수사가 끝나지 않아 섣불리 판단할 수 없지만 향후 법정에서 양 씨의 행위가 불안스러운 상태에서 벌어졌고 양 씨가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했다는 점이 인정된다면 양 씨의 책임이 조각돼 무죄가 인정될 가능성은 있다”고 덧붙였다. [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