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성 전 총리 | ||
문제의 문건은 지난 1997년 4월7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삼성그룹 비서실장 간의 대화를 미림팀이 녹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이 문건의 신빙성은 얼마나 될까.
97년 초 이수성 전 총리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함께 강력한 대권 후보로 통했지만 전략 부재와 자금 부족 등으로 결국 낙마했다. 당시 이 전 총리를 가장 가까이서 보좌했던 A씨를 통해 X파일 문건 내용의 사실 여부와 경선 정국의 뒤안길을 돌아봤다.
X파일 가운데 홍석현 사장과 이학수 비서실장의 대화 내용 녹취록을 보면 삼성그룹이 당시 신한국당 차기대권 유력 후보에 대한 정치자금 지원방안을 협의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1997년 초는 신한국당의 ‘9룡’들이 1년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 본격적인 대권 행보를 보이던 시기였다. 이수성 총리는 3월 초 당 고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김심’ 낙점 논란과 함께 여권 경선 구도에 파란을 몰고 왔다.
본인의 열정에 TK 출신으로 고정표가 많고, YS도 ‘민주계를 통해 이 전 총리를 간접 지지한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삼성은 당시 이러한 정치 지형을 꿰뚫고 있었다. 여권 후보 ‘넘버2’ 이수성 후보에 대해서도 ‘보험’을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잠시 그들의 대화로 돌아가 보자.
X파일에서 홍석현 사장은 이학수 비서실장에게 “요즘 이수성씨측도 열심히 뛰고 있지요?”라고 묻는다. 이에 이 실장은 “홍 사장님 출장 중 우리 기자한테 이수성씨가 ‘삼성이 이회창이를 밀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지?’ 하기에 그 기자가 ‘그게 아니고 우리 회장님이나 사모님은 이 총리(이수성씨는 1995년 12월부터 1997년 2월 말까지 총리로 재직)께 호감을 가지고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고 하니까 ‘삼성이 그렇게 감을 못 잡을 리가 없지!’ 그러더랍니다. 그게 좀 의미가 있는…”이라고 홍 사장에게 대답한다.
이에 홍 사장이 “의미 있는 얘기”라며 맞장구를 치자 이 실장은 재차 이수성씨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는 발언을 한다. 그는 “저는 그에 대한 해석을 대통령이 이수성씨에게 뭔가 언질을 준 것이 사실이며, 지금 대통령은 두 가지 카드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이회창이고 그 다음 카드는 이수성인 것 같애요”라고 말한다.
홍 사장은 이 말을 듣고 “말하자면 이회창씨가 잘 하면 할 수 없이 주는 것이고 잘 안되면 이수성씨로…”라고 답한다. 삼성이 이렇게 판단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최형우 서청원 의원 등 민주계 인사들이 이수성 지지를 노골적으로 나타난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수성 총리는 삼성의 예상과 달리 그 해 7월 열린 후보 경선에서 5위를 기록했다. 여기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우유부단한 후보 관리도 한몫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전 총리의 최측근 A씨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는 정치권 인사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신한국당 경선이 끝나고 이회창 대표가 공식 주자로 선정된 뒤였다. 허주(김윤환 신한국당 고문의 아호)와 김우석 전 내무부 장관, 그리고 나, 세 사람이서 이태원에서 저녁을 먹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허주에게 ‘선배님, 스스로 발등 찍은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면 그에게 반기를 들었던 TK세력이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허주는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변하면서 ‘우석아, 니가 말해 봐라. YS가 한 번이라도 내게 SS(이수성 총리의 영문 이니셜)를 후보시키라고 했나’라고 말했다. 김우석 장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시 YS는 허주에게 한 번도 ‘이수성 총리를 당에서 전폭적으로 지지해 대권후보로 만드는 데 협력하라’고 직접 얘기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당내에 일정한 지분이 있어 ‘킹메이커’로 통했던 허주도 대통령이 이 전 총리에 대해 ‘뜻’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YS는 YS대로 허주가 자신의 의중을 잘 헤아려 당내에서 이수성 바람을 일으켜주기를 내심 바랐다고 한다. YS가 ‘불감청 고소원’(不敢請固所願: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바란다)의 심정으로 허주에게 이수성 총리 지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했는데, 허주는 대통령의 ‘복심’을 몰라보고 이 총리 지지를 주저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회창 대표가 당을 반쯤 장악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YS가 허주에게 당을 깨고 이수성 지지를 선언하라고 지시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현실적 판단도 깔려 있었다.
이수성 전 총리는 경선에서 5위를 기록한 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을 탈당, ‘김대중 대통령론’을 설파하며 이회창 전 총리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현재 이수성 전 총리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