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5일 노무현 대통령이 KBS 특집토론회 ‘국민과의 대화’에서 패널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심지어는 연정론 등과 관련한 노 대통령의 진정성을 이해하자고 옹호했던 여당 내에서조차 ‘권력 통째 이양’ 등 충격적인 발언에 당혹해하며 파문 진화에 고심하고 있다. 야당은 대통령의 거듭된 연정 제안에 “정 자신 없으면 대통령직을 내놓으면 될 것 아니냐”는 조소까지 흘렸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정말로 정치권력을 내놓겠다는 뜻인가. 어떤 전제를 깔든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리, 군 통수권의 자리를 내놓겠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노 대통령의 ‘권력 통째 이양’ 발언의 진의는 무엇일까.
지난 8월24일 낮 12시 청와대 영빈관. 노 대통령과 출입기자단 오찬 간담회 때 헤드테이블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
“말이 연정이지 한나라당에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생각도 안해 보고 ‘뻥’ 차버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날 헤드테이블에서의 발언은 모두 비보도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일절 다른 언론지상에 소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진의는 유감없이 드러난 셈이다.
출입기자 한 명이 물었다. “그러면 야당과 만나 그런 얘기할 생각은 없습니까.” 그러자 노 대통령은 “만날 생각입니다. 그런데 겁이 납니다. 정치협상을 제안하려고 하는데, 만나야 협상을 하지 않겠습니까.”
만나려고 하는데 야당이 자신의 본의를 믿어주지 않고 비난부터 해대니까 겁이 난다는 뜻이다.
지난 8월25일 저녁 청와대. 노 대통령과 이해찬 총리, 정동영 통일부 장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 등 여권 수뇌들이 비공식 만찬회동을 가졌다. 이른바 여권 지도부 12인 모임 멤버들이 대부분 참석했고, 새로 취임한 이병완 비서실장도 참석했다. 참여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맞아 여권 지도부가 모여 조촐한 저녁식사를 한 것이라는 여권 관계자의 설명이었지만,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다시 예의 연정 제안과 선거제도 개편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한 참석자는 “노 대통령이 지역감정 극복을 위해 부산에서 여러 차례 선거에 출마했다 떨어진 경험을 소개하면서 ‘낡은 지역주의, 분열적 요소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한 것은 이해하겠는데, 권력을 한나라당에 내줄 수도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뜻을 완곡하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병완 비서실장이 지난 26일 오전 신임 비서실장 취임식을 마치고 청와대 춘추관을 찾아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그는 “언론과 보다 밀접하게 보다 많은 교감을 나누면서 여러분들이 가장 중요한 국정 파트너라는 인식을 가지고 업무를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 실장은 이어 전날 TV토론회에서 관심을 모은 노무현 대통령의 “권력을 통째로 이양” 발언으로 화제를 이어갔다. 이 발언이 ‘하야설’로 확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 실장은 “우리 국민들이 수십년 간 내려온 마지막 남은 틀(지역주의)을 깨고 가야 한다는 역사적 결단에 정치권과 한나라당이 참여해달라는 호소”라고 자신의 해석을 가미하기도 했다.
▲ 노무현 대통령 | ||
이 같은 외곽에서의 ‘정치 해몽’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의 직접 언급, 그것도 24일 점심 때 ‘오프’(off)를 전제로 한 “한나라당에 정권 이양” 발언, 그리고 다음날인 25일 저녁 공중파 방송에서 행한 “권력을 통째로 이양” 발언이 갖는 강도는 그대로 살아 있다. 이는 측근이나 다른 사람들의 추가적인 변명과 해석으로도 상쇄되지 않는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다.
이와 관련, 여권에서는 노 대통령의 속내가 내각제로의 권력구조 개편을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대통령이 내각제 수준의 권력 이양을 여러 차례 언급한 본뜻은 내각제로의 개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권력을 통째로 내놓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취지도 권력구조 개편 개헌을 검토하겠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특히 노 대통령이 최근 이런저런 자리에서 독일의 슈뢰더,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부럽다는 말을 했다는 점, 얼마 전 정치부장단 간담회에서 영국의 선거제도에 관해 언급했었다는 점 등으로 미뤄 이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위에 언급한 세 나라는 모두 내각제 국가다. 게다가 지방언론사 편집국장단과의 간담회에서는 ‘양원제’의 필요성까지 거론했다.
개헌론이 점화될 경우, 논의의 진전속도에 따라서는 총선 시기가 2008년에서 내년이나 대통령선거가 있는 2007년쯤으로 앞당겨지면서 노 대통령 임기중에 실제로 ‘권력을 통째로 내주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욱 단순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한나라당이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선거법 협상에 적극 임하고 그 선거법이 발효되는 순간, 노 대통령이 아무런 미련 없이 대통령직을 벗어던질지도 모른다는 관측이다.
노 대통령의 심기에 밝은 열린우리당의 한 중진 의원은 “불길하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노 대통령의 성격을 너무 잘 안다. 그런데 권력 이양이라는 게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과거 1996년부터 1년 이상 통추를 함께 하면서 노 대통령과 고락을 함께 했던 다른 여권 인사는 “노 대통령은 편법을 모르는 지극히 솔직담백한 분이다. 그게 걱정되는 지점”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과연 노 대통령이 권력을 훌훌 벗어던지는 그런 상황이 올 것인가. 이래저래 참여정부 후반기 화두는 정치가 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