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시장, 손학규 지사(왼쪽부터). | ||
노무현 대통령-박 대표 간 청와대 회담(7일)과 당 혁신안 처리 향배에 따라 조성된 결과다. 여권 발(發) 대연정 제안에 대해 ‘불가’로 한 목소리를 냈던 세 사람이지만 막상 논란이 일단락되는 국면에 접어들자 각자의 손익계산에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이다.
영수회담을 전후한 국면 전개에서 수혜자를 꼽으라면 단연 박 대표다. 당내 주류는커녕 비주류 내에서도 “‘대박’을 터트렸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말로 ‘맞짱’을 떠서 이길 사람이 없다”는 노 대통령과의 담판에서 제대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페이스에 말릴 것이란 당내 우려를 말끔히 불식시킨 것이 컸다. 여기에 비주류들의 공세가 집중됐던 ‘임기 단축’ 논란이 일단락된 것도 호재다.
실제 ‘노(盧)-박(朴) 회담’의 결과는 4·30 재·보선 승리의 ‘약발’이 떨어지자 흔들리기 시작한 박 대표의 입지를 눈에 띄게 강화시켰다. “대중적 인기는 높지만 콘텐츠는 부족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당내 비판세력들조차 박 대표가 ‘타고난 승부사’란 평가를 받는 노 대통령 면전에서 “앞으로 연정 이야기는 하지 마시라”고 못을 박은 데 대해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됐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말 4대 입법 협상 과정에서 “수첩에 적어 온 내용만 얘기한다”는 비판 속에 ‘수첩 공주’란 불명예스러운 닉네임을 얻었던 박 대표가 이번 회담에서 별도 메모 없이 ‘토론의 달인’이란 노 대통령과 팽팽한 대결을 벌인 것을 두고는 당내에서는 물론 여권 내에서조차 놀라워할 정도. 회담 후 당 홈페이지엔 “정말 잘했다” “역시 박근혜다” “박 대표의 아름다운 승리” “박 대표의 KO승” 등 박 대표가 노 대통령에게 할 말은 다 하고 왔다는 호평이 줄을 이었다.
당내 중진들과 비주류측도 회담에서 보여준 박 대표의 모습에 후한 평점을 줬다. ‘박 대표의 리더십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일 뿐’이라며 날을 세웠던 김문수 의원은 “박 대표가 노 대통령의 수에 말려드는 것 아닌가 하고 마음을 졸이는 사람이 많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단호하게 정리를 잘했다고들 한다”고 말했고, 당내 소장파의 리더로 ‘반박(反朴) 그룹’의 핵심인 남경필 의원도 “(박 대표가) 노 대통령과 ‘맞짱’ 뜨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격찬하고 나섰다.
중도 노선을 걸으며 간간이 박 대표의 ‘독주’를 견제해 왔던 강재섭 원내대표도 “청와대 회담에서 박 대표가 의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노 대통령에 전달했다는 분위기다”며 긍정 평가했고, 회담 당일 바지 정장 차림을 한 박 대표에 “잘 싸우고 오시라. 옷차림이 좋다”고 덕담했던 박희태 국회부의장은 “박 대표가 이번 회담을 통해 야당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국민에게 각인시켰다”고 격려하기도 했다.
2월 이후 줄곧 박 대표를 괴롭혔던 ‘조기 전당대회 개최-대표 임기 단축’ 문제가 정리된 것도 박 대표에겐 크게 힘이 된 사안이다. 아직 당 혁신위가 내놓은 전체 안에 대한 처리가 매듭된 것은 아니지만 최대 쟁점인 현 지도부의 임기 보장 문제가 8일 열린 운영위에서 통과됨으로써 박 대표는 내년 5월 지방선거를 자신이 주도하는 가운데 치를 수 있게 됐다.
한 핵심 당직자는 “노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에서 박 대표가 보여준 강인함이 바로 다음날 열린 운영위 회의에서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며 “박 대표가 노 대통령의 회담 제의를 전격적으로 수용한 것이나, 회담 날짜를 운영위가 열리기 바로 전날 잡은 것은 지금 와 생각해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당내에서는 박 대표가 차기 대권구도의 주요 고비인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의도대로 후보 공천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당 장악력을 배가시킬 수 있게 됐다는 평가를 나오고 있다. 아울러 대중적 인기 면에선 당내에서 따를 사람이 없는 박 대표가 지방선거 공간에서 전국을 순회하며 유세를 펼쳐 ‘압승’을 거둔다면 이듬해 당내 대선후보 경선은 해보나 마나라는 전망도 곁들여진다.
박 대표측의 분위기가 ‘쾌청’이라면 이명박 서울시장측은 ‘흐림’이다. 8월 말까지만 해도 각종 대선후보 지지도 조사에서 박 대표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정도로 상승세를 탔던 이 시장은 9월 들어 기세가 주춤한 상태다. 10월1일 청계천 개통을 계기로 당내 기반과 대중적 인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야무진 구상을 가다듬어왔던 이 시장측으로선 일련의 상황 전개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형편이다.
이 시장측은 무엇보다 ‘공정한 대선 관리’를 위해 끈질기게 요구해 온 조기 전당대회(전대) 개최 문제가 물 건너간 데 대해 위기감을 느끼는 분위기다. 혁신안 처리를 앞두고 측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국가발전전략연구회를 중심으로 ‘조기 전대-박 대표 임기 단축’ 관철을 위해 전력투구했지만, 막상 소속 의원 연찬회(8월30~31일)-운영위원회(9월8일)에서 제대로 싸움 한번 못해 보고 좌절되자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 측근은 “이미 내년 지방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이 시장으로선 박 대표 체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당에 쉽게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질 수밖에 없는 경선을 치르기 위해 당에 들어가기도, 그렇다고 섣불리 당 밖에서 세력화를 시도하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이 측근은 “10월 재·보선 때까진 ‘영수회담 효과’에 힘입어 박 대표의 상승세가 계속 되지 않겠느냐”며 “당분간은 당내 상황과는 거리를 둔 채 청계천 개통 등을 적극 활용해 대중적 지지도를 높인 후 이를 통해 당내 기반을 넓히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박 대표와 이 시장 간 ‘양강 구도’에 막혀 이렇다 할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손학규 경기도지사측도 고민이 깊다. 손 지사는 소처럼 묵묵히 자기 길을 가려 하지만 주변에선 레이스를 계속할지 여부를 원점에서 고민해야 할 만큼 형편이 어렵다는 평도 나온다. 각종 여론조사에 좀처럼 ‘만년 3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손 지사를 두고 당내에선 이미 독자적인 ‘킹(King) 카드’로 보기보다는 박 대표 또는 이 시장 중 누구와 러닝메이트를 이룰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두는 기류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
이와 관련해 ‘박 대표와 손 지사 간 연대가 물밑에서 모색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두 사람과 모두 각별한 관계인 김덕룡 의원이 자리잡고 있다’는 얘기가 최근 당내에서 급격히 확산돼 주목을 끌고 있다. “김 의원측이 정·부통령제 개헌을 전제로 ‘박근혜 대통령-손학규 부통령’, 개헌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박근혜 대통령-손학규 책임총리’의 그림을 손 지사측에 제시했다”는 것이 ‘박근혜-손학규 연대론’의 뼈대다.
김 의원과 가까운 한 의원은 “한나라당이 ‘영남당’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박 대표와 손 지사가 연대해 ‘영남+수도권’ 조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김 의원의 생각”이라며 “김 의원은 이를 토대로 자신은 ‘포스트 박근혜’ 체제를 선출할 내년 7월 전당대회 당권경쟁에 나선다는 계획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내에서는 손 지사가 재야 운동권과 민주계 선배인 김 의원의 제안을 놓고 고민중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특히 김성식 경기도 정무부지사, 이수원 공보관 등 손 지사 캠프의 핵심인사들이 과거 김 의원 계보에 속했다는 점까지 곁들여지면서 손 지사가 조만간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이란 관측도 나돌고 있다.
손 지사측은 대외적으론 박 대표 등 다른 대선주자와의 연대설에 대해 “사실과 다르며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이다. 한 측근은 “지지도가 정체국면을 보이다 보니 갖가지 얘기가 다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손 지사는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묵묵히 자기 페이스대로 밀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측근은 그러나 “손 지사는 노 대통령 집권으로 나라가 너무 왼쪽으로 옮아갔는데 이를 바로잡는 데 자신의 역할을 찾고자 하고 있다. 그런 맥락이라면 손 지사가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테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다른 길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고 말해 연대론과 관련해 여운을 남겼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