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2년 12월 대선 유세를 벌이는 이회창 전 총재. 오른쪽은 대선결과가 나온 후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모습. | ||
사실 정치인은 명분에 따라 움직인다. 이 전 총재의 정계 복귀도 명분만 있으면 언제든 성사될 수 있는 카드라는 게 정치권의 정설이다. 어쩌면 이 전 총재도 현재 정계 복귀 시점을 저울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에게 ‘복귀 시나리오’가 있다면 지금까지 그의 행보를 통해 실체를 추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전 총재는 지난 2003년 한해 동안 대선자금 수사 와중에 꼭 엎드린 채 옥인동에 칩거했다. 하지만 대선자금의 모진 바람이 옥인동을 빠져나간 뒤 그는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전 총재는 “주변에 걸림돌이 되지 않겠다”는 평소의 뜻을 접고 지난해 10월 서울 남대문 인근에 사무실을 오픈했다. 처음 사무실을 열었을 때만 해도 측근들이 “이 전 총재가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장소에 불과하다”며 사무실 위치조차도 공개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기자와 정치인을 비롯해 찾아오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이 전 총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사무실에 나와 독서 등으로 소일하고 있고, 이종구 이흥주 전 특보 등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이 전 총재는 올해 5월에 옥인동에서 용산구 서빙고동으로 이사도 했다. 이도 보기에 따라서는 ‘민감한’ 대목이다. 이 전 총재의 옥인동 집은 사실 풍수지리학적으로 매우 좋지 않은 땅이라는 게 풍수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대문이 안채의 뒤쪽에 있어 ‘복’이 굴러들어오기가 어렵다는 지적도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길지인 상도동 자택을 계속 고수했던 점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산 집에서 동교동으로 옮겨온 뒤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대권주자들의 집이 꼭 주거용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전 총재의 복귀 시나리오가 있다면 지금까지의 사무실 오픈과 이사 등은 간접적인 행보에 그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뒤 이 전 총재의 행보에는 보다 확연한 정치 색깔이 덧씌워지고 있다.
우선 그는 지난 8월 말부터 ‘건강을 위한’ 산행을 시작했다. 이 전 총재는 부인 한인옥 여사와 이정락 전 후원회장, 이흥주, 이종구 전 특보를 비롯한 특보단 등 측근 20여 명과 청계산을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산행을 즐기지 않던 그가 산에 오르기 시작하자 주변에서는 이 전 총재의 이상 행보에 대해 다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산악회를 ‘벤치마킹’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 전 총재측은 “산행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건강 때문”이라며 “정치적 목적으로 산행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자주 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 즈음 한나라당 홍문표 의원이 당 연찬회에서 그의 정계복귀를 공식 거론하기에 이른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이 전 총재가 청계산으로 첫 산행을 갔던 바로 그 날이었다. 홍 의원은 이 전 총재의 고향인 예산·홍성이 지역구다. 홍 의원은 당시 “지난 2년 반 동안 ‘연습정치’에 골병든 나라에 정치 경제 사회 국방 외교 어느 곳 하나 통합과 조정 없이 ‘분열’만 난무한다”면서 “이렇게 혼란스러울수록 국민의 마음속엔 ‘창’을 부르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당이 차기대선 승리를 위해서 이 전 총재가 필요한 만큼 삼고초려를 통해서라도 역할을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 전 총재의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당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홍 의원이 이 전 총재측과 사전에 조율을 한 상태에서 그런 발언을 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홍 의원측은 “이 전 총재가 어떤 분인가. 그런 오더를 내리고 할 사람인가. 그리고 홍 의원도 20년 동안 야당 생활을 해온 강직한 사람이다. 전혀 사실무근이다”라고 밝혔다. 물론 이 전 총재측도 ‘사전 교감설’을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 관계자의 주장이 사실에 가깝다면 ‘창’의 정계 복귀 시나리오가 이미 가동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전 총재측은 그의 정계복귀와 관련, 한나라당 전·현직 의원들의 발언에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앞서의 관계자는 “혹시 이 전 총재가 정계에 복귀하면 안 된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할 경우 그쪽으로부터 유감스럽다는 식의 반응이 오곤 한다고 들었다. 그쪽에서 정계복귀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확실히 챙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밝혔다.
물론 홍 의원의 ‘창 복귀론’에 대해 상당수 한나라당 의원들은 외견상 ‘뜨악한’ 표정이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당시 그런 주장이 나왔지만 대부분의 의원들이 전혀 수긍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이 전 총재의 정계복귀는 대세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홍 의원의 정계복귀 발언 뒤, 이 전 총재의 ‘정치적’ 행보는 더욱 가속도가 붙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지난 9월 말 박근혜 대표는 이 전 총재를 만나 오찬을 가졌고, 이명박 서울시장도 며칠 뒤 이 전 총재와 부부동반 모임을 가졌다. 또한 손학규 경기지사와 강재섭 원내대표 등도 이 전 총재와 수시로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이 전 총재의 정계 복귀론뿐만 아니라 ‘대선 역할론’까지도 연관시키고 있다. 정가에선 한나라당 대권주자들이 ‘창심 잡기’에 나선 게 아니냐는 해석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전 총재측은 “이 전 총재는 정계를 은퇴해 ‘창심’이란 있을 수 없다”면서 “다만 차기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정권을 탈환하는 데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여전히 ‘창’과 현실 정치 사이에 굵은 선을 그어두려는 모습이다.
지난 5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TNS에 의뢰한 조사에서 한나라당 지지자 중 40.8%가 이 전 총재의 정계복귀에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박창달 의원은 “X파일 문제가 터진 뒤부터 이 전 총재의 정계복귀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은 많이 줄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X파일 사건이 마무리되고 내년에 개헌론이 불거져 내각제 개헌이 유력하게 검토될 경우, 당내 일정 지분이 있는 이 전 총재에게도 ‘마지막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게 정가의 관측이다. 일부에서는 “이 전 총재가 그럴 분이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치지만 이 전 총재가 그런 주장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인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다. 과연 이 전 총재는 대권 ‘삼수’의 길로 들어설까. 그 답은 ‘창’만이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