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8일 노무현 대통령이 코엑스에서 열린 ‘2005 에너지전시회 관람 및 제3차 국가에너지 자문회의’에 참석해 가스하이드레이트 전시관에서 시연을 참관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하지만 노 대통령의 ‘제자리걸음’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 뿐. 오히려 곧 불어닥칠 정치구조 대개혁을 위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는 것이 유력한 해석이다.
노 대통령은 최근 대연정 논란을 거치면서 민심 이반이 극심하고 지지율도 20%대에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 상당히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밀어붙이고 있는 정치 대개혁도 국민적 공감대 없이는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대연정’ 논란 과정에서 생채기가 난 민심을 다독거리고, 내년에는 정치적 의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화두’를 던져 정국을 계속 자신이 직접 관리할 것으로 전해진다. 노 대통령의 ‘침체 정국 대탈출 시나리오’를 따라가 봤다.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초약세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9월 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잘 하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이 20.4%에 머문 것이다. ‘아직도 1백명 가운데 20명 정도의 지지자는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이런 수준의 지지율을 심각한 국정 운영 공백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
전문가 A씨는 이에 대해 “대통령 중심제 아래서 지지도의 마지노선은 25%로 보고 있다. 만약 그 이하로 내려간다면 어떤 이슈나 정책을 내세우더라도 국민 절반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각종 정책의 입안과 추진에 심각한 악영향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연정 제안 이후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많이 떨어졌고, 다른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하는 데도 굉장히 부담이 오고 있다”고 진단한 점도 대통령 지지도 하락과 정책 추진의 상관관계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나는 주방을 고쳐야 한다고 보는데, 국민들은 좋은 요리를 원한다”며 대통령의 본뜻을 알아주지 않는 민심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토로한 바 있다. 이는 지지율에 연연해하지 않고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개혁을 위해 뚜벅뚜벅 제 갈 길을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혔다.
하지만 ‘대연정’ 논란을 거치면서 대통령의 ‘민심관’에도 변화가 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연정 논란 이후 지지율이 더욱 떨어지고 있어 그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침체 정국 탈출 시나리오’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대 국민 관계를 시급히 재정립하는 것이다.
청와대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노 대통령은 ‘대연정’ 정국을 지나면서 민심 이반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청계천 개통행사나 10월 개최되는 울산 전국체전 등에도 빠짐없이 참석해 대국민 접촉을 강화할 것이다”면서 “최근 이병완 비서실장은 각 비서진에게 ‘그동안 정치분야에 관한 의제가 너무 많이 나왔다. 부동산 문제, 양극화 해소, 조세 문제 등 이미 드러난 의제는 제외하고 국민적인 호응과 공감을 끌어낼 이슈를 발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향후 정기국회 중에 이를 공론화해 돌아선 민심을 회복시키는 계기로 삼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청와대가 현재 대연정 정국 이후 추락한 지지율을 회복시키기 위한 중·단기적 처방전을 구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노 대통령은 야당의 극심한 반발을 불렀던 소주와 LNG 세율 인상 문제를 재검토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민심 밀착 행보’를 보이고 있다. 노 대통령은 소주세 인상 재검토와 관련해 “민심을 딱 업고 나오니 할 말이 없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노 대통령은 “소주세 문제는 정부의 오랜 숙원”이라며 “정책적으로는 정부안이 맞는데, 정치적으로 그것을 관철하기가 쉽지 않다”고도 말했다. 그동안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은 펴지 않겠다고 공언해왔던 것과 비교하면 한 발짝 물러선 모습이다.
노 대통령의 두 번째 정국 탈출 시나리오는 그랜드 아젠다를 개발해 정국 주도권을 다시 잡겠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정동영 김근태 두 ‘잠룡’의 당 복귀가 예상보다 빨라질 경우 정치판은 대권 경쟁 구도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의 정치 구조 개혁의 화두는 대권 경쟁에 밀려 뒷전으로 밀려날 수도 있다.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이 같은 대권 경쟁의 조기 과열 사태를 막기 위해 노 대통령이 그랜드 아젠다를 먼저 던져 정국 주도권을 대권 주자들에게 뺏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현재로서 노 대통령이 던질 수 있는 유력한 그랜드 아젠다는 남북문제와 관련된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하다. 앞서의 청와대 소식통 A씨는 이에 대해 “남북정상회담이 대권 경쟁 구도를 누를 수 있는 비교우위 이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일부에서는 오는 11월 부산 APEC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격 방문해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11월 6자 회담과 APEC 개최가 겹쳐 일정상 맞지 않는다. 아마 시기는 내년 봄이 적당할 것이다. 지방선거와 너무 가까우면 ‘선거용’이라는 비난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전에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추진할 민심 회복과 그랜드 아젠다 선점도 결국은 대연정으로 대표되는 정치 구조 대개혁을 이루기 위한 ‘우회로’라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은 최근 대연정 논란에 대해 “내가 배가 고픈데, ‘빵을 사게 돈 좀 주세요’ 해야 하는데, ‘돈 좀 주세요’만 했다”며 대연정의 전술적 실패를 인정한 바 있다. 대연정의 근본 배경을 국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해 공감대를 먼저 얻었어야 하는데, 무작정 이해해달라고 하니 자신의 대연정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역구도 해소와 상생정치가 본질인데, 그 수단인 대연정론이나 2선후퇴 등이 부각되면서 자신의 본뜻이 왜곡됐다는 것. 노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앞으로 그가 ‘배 고픈 사정’(대연정 추진의 근본 배경)을 국민들에게 더 설득해나가겠다는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정치권에서는 노 대통령이 대연정 구상을 절대 버리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노 대통령도 “당분간 연정 발언을 자제할 것”이라고 말했을 뿐, 대연정 구상을 폐기했다고 말한 적은 없다. 오히려 대연정 구상을 더욱 구체화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노 대통령은 지난 9월 중순 남미 순방 전 청와대 비서진에게 ‘문제를 푸는 나라와 풀지 못하는 나라의 사례를 전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연구 분석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남미 순방 도중 “귀국하면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의 정치 상황 모델들을 한번 분석해 볼 생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노 대통령은 지난 9월27일 중앙언론사 경제부장단과의 간담회에서 ‘독일식 모델’을 화두로 던지기도 했다. 그는 간담회를 앞두고 주독 한국대사관이 보낸 ‘독일의 경제정책 변천과정’이란 제목의 정책분석 보고서를 미리 배부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독일 등 유럽식에서 배울 점이 많은지, 멕시코 등 곤경에 빠진 중남미 모델에 시사점이 많은지, 한국은 앞으로 어디에 속할 것인지 굉장히 고심된다”고 발언했는데 이는 최근 그가 외쳐온 ‘정치문화 개혁’이란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나온 발언으로 보인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이 각국의 권력 구조를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대통령은 여전히 우리나라의 권력 구조가 중남미처럼 대통령제에서 여소야대 체제가 되는 것보다는 영국 프랑스 등 서구 국가들처럼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더라도 여대 체제(대연정)를 만들어내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은 요즘 조용하다. 하지만 그 침묵 뒤에선 정치구조 대개혁의 엄청난 회오리가 요동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