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서울시장이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회창 전 총재를 폄하한 배경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 ||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지난 17일 발행된 <시사저널>과의 인터뷰 내용. 당시 이 시장은 ‘이회창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솔직히 노무현·이회창을 놓고 인간적으로 누가 더 맘에 드냐 하면 노무현이다. 이쪽(이회창)은 너무 안주하고 주위에서 둘러싸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시장되고 나서 뭐 한 건 했다고 그 다음에 안주한 적 있는가”라고 밝혔다.
또한 한나라당의 지지도와 관련해서는 “역동적인 후보가 나서면 당이 역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공약도 당이 만드는 공약이 아니라 후보가 만드는 공약이어야 한다. 이제까지 이회창씨가 당에서 만든 공약 가지고 두 번 다 써먹었다. 나는 서울시장 선거 때 당에서 만든 공약 하나도 없었다. 전부 내 공약이고, 장소도 청계천 입구인 무교동 사무실에서다. 당 지지도는 리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이 시장의 발언은 이 전 총재의 심기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 전 총재측은 즉각 “이 시장이 벌써부터 대권병이 든 게 아니냐”며 분개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상황은 결국 이 시장이 공식 사과를 하고 이 전 총재측이 이를 수용하는 선에서 일단락됐다.
이 시장은 이 전 총재에게 사과하면서 “발언의 일부가 제 뜻과 다르게 전해졌다”고 해명했지만, 정치권에선 “이 시장이 자신의 속내를 의도적으로 표출했던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우선은 이 시장이 ‘대권 재수’에 실패한 이 전 총재와 자신은 자질이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전 총재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우호적 관계’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특히 이 전 총재가 10월 들어 활발한 대외활동을 펴며 보폭을 넓히고 있는 것에 대한 견제 성격이 담겨 있다는 관측도 흘러나오고 있다.
실제로 최근 들어 박 대표와 이 전 총재 사이엔 상당히 우호적인 기류가 흐르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박 대표가 주도해서 조성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박 대표는 지난 9월23일 서울 시내 음식점으로 이 전 총재를 초청, 두 시간 동안 오찬회동을 가졌다. 회동 직후 양측은 “특별한 이슈가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의례적인 만남이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당시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의와 안기부 불법도청 사건, 북핵 6자 회담 합의 등 굵직한 현안들이 산재해 있던 시기였다. 이에 박 대표가 먼저 이 전 총재에게 자문을 구하는 자리를 마련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 지난해 9월 박근혜 대표가 이회창 전 총재 자택을 방문한 모습. | ||
이들 ‘박-이’를 오가며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인사는 이 전 총재의 ‘복심’(腹心)으로 불리는 유승민 전 한나라당 의원. 지난 1월 박 대표는 대표로 취임한 직후 단행한 첫 당직개편에서 유 전 의원을 대표 비서실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정가에선 자연스럽게 ‘박근혜-이회창 연대설’까지 불거졌다.
비례대표였던 유 전 의원이 10·26 재선거에 출마(대구 동 을)하자 이 전 총재가 직접 선거구를 방문, 그를 지원사격한 것도 이 전 총재의 신뢰가 두텁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유 의원은 박 대표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도 꾸준히 이 전 총재의 자택과 남대문 사무실을 오갔다. ‘박근혜-이회창’의 정치적 교감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나라당의 차기 대권 주자 중 하나인 이 시장으로선 이 같은 ‘박-이’의 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전 총재가 정치 일선에 나서진 않지만 그의 잠재된 정치 영향력은 아직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대변인실 관계자는 최근 사석에서 “이 전 총재는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1천만표 이상을 얻었다. 아직도 상당수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차기 대선에서 이 전 총재가 ‘삼수’에 도전하지 않더라도 한나라당 후보 선출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이유로 현재 거론되고 있는 한나라당의 대권 예비 주자들이 ‘창심(昌心) 잡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
이 같은 상황 때문인지 이 시장은 차기 대선 후보 경선에 대한 자신감을 강하게 피력하면서도 ‘경계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 13일 관훈토론회에서도 그 일면이 드러났다. 이 시장은 차기 대선 후보 경선과 관련해 “경선을 선호한다”면서도 “공개적이고 투명하고 공정한 경선을 통해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후보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이 시장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이 시장이 공정한 경선을 강조하는 것을 보니 행여나 이 전 총재 등이 킹메이커로 나서 박 대표나 여타 특정 후보를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며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이 전 총재의 이 시장에 대한 감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 총재가 대선 정국에서 역할이 커질 경우 이 시장으로선 유리할 게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런 까닭으로 이 시장의 이번 이 전 총재 폄하 발언 대해 “다분히 정치적 계산이 깔린 의도적 발언”으로 분석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이 시장이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 전 총재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어찌 보면 밀월관계중인 이 전 총재와 박 대표에게 견제구를 던진 것으로도 보인다”고 해석했다. 또한 이 의원은 “이 시장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거의 15년이 지났다. 그런 베테랑이기 때문에 ‘박근혜-이회창 연대설’까지 흘러나오는 상황에서 이를 조기에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발언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과감하게 말했고, 예상대로 이 전 총재를 진노하게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시장이 작심하고서 이 전 총재를 정조준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시장은 과연 무엇을 노리고 ‘창 때리기’에 나섰던 걸까. 정가 일각에선 이 시장이 향후 한나라당 내의 ‘비(非)창(昌)’ 세력을 끌어안기 위해 띄운 애드벌룬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파문이 커지자 이 시장은 지난 20일 한나라당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당원 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란 글을 통해 이번 파문을 모두 자신의 불찰 탓으로 돌리며 이 전 총재에게 사과를 청했다. 그러나 이 전 총재측은 이 시장의 사과를 받아들이면서도 그와의 만남은 사실상 거부했다. 이번 파문이 말실수인지 아니면 의도된 발언인지를 떠나 이 시장으로선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