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7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10·26재선거에서 승리한 후보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
경기도 광주 등 4곳에서 치러진 10·26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전승’(全勝) 신화를 이어가 잔치 분위기인 한나라당 내에 ‘독배론’(毒盃論)이 부상해 눈길을 끌고 있다.
독배론이란 4·30 재보선에 이어 10·26 재선거에서도 압승한 것이 2007년 대선 승리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한나라당에 보약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독이 든 술잔을 들이킨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주류 일각에서 “재선거에 열심히 뛰지 않은 사람들이 뜬금없이 내뱉는 소리”라며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독배론이 확산되는 것은 그만큼 한나라당의 체질이 취약하다는 반증”이라는 주장에 상당수 의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상황이다.
일견 ‘부자 몸조심’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독배론이 한나라당 내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이번 재선거의 ‘승인’(勝因)이 기본적으로 여권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이었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소규모 전투(재·보선)에서 승승장구했다고 자만할 경우 전쟁(대선)에선 다시 패배할 수 있다는 경험칙에 따른 것이란 해석도 있다. 실제 한나라당은 창당 이후 역대 재·보선에서 9승1패라는 압도적인 승률을 보였고 2002년의 경우 대선 6개월 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대승’(大勝)했지만 정작 대선에선 힘없이 무너졌던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한 핵심 당직자는 “이번 재선거는 기본적으로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짙었던 만큼 한나라당이 마냥 승리감에 젖어 있을 상황은 아니다”며 “지금부터 ‘대선 필승’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짜는 데 주력해야 2002년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맹형규 정책위 의장도 공개회의 석상에서 “이번 선거 결과는 ‘한나라당의 승리’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열린우리당의 패배’로 봐야 한다. 우리가 쉽게 이길 수 있었던 지역에서도 일부 고전한 부분들에 담겨 있는 국민들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고, 이강두 최고위원은 “냉정히 우리 자신을 비판해야 한다. ‘너희 야당도 잘못하면 얼마든지 심판하겠다’는 국민들의 뜻이 재선거의 교훈이다”고 가세하고 나섰다.
비주류측의 분석은 더욱 비판적이다. 당내에서 ‘전략통’으로 통하는 수요모임의 한 핵심 의원은 “10·26 재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콘텐츠 면에서 달라진 모습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했다. 독자적인 이슈를 제기해 대중적 지지 기반을 넓히기보다는 ‘국가 정체성’ 논쟁을 제기해 당의 수구적 체질을 다시 한번 드러내거나 여권의 실정을 부각시켜 반사이익을 노렸던 점은 장기적으로 해악으로 작용할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영남권 한 초선 의원은 “대구 동 을에서 열린우리당 이강철 후보가 44% 넘는 득표를 한 것은 한나라당이 위기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박근혜 대표가 자신의 비서실장을 후보로 내세우는 등 ‘올인’의 자세로 임했음에도 겨우 이긴 것은 한나라당이 지금처럼 구태의연한 행태를 보일 경우 영남 유권자들이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음을 경고한 것으로 봐야 한다. 만약 다음 대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영남에서 이번 재선거 때처럼 선전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보라. 한나라당으로선 안방에서부터 무너지는 낭패를 겪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당내에서는 독배론이 현실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박 대표가 향후 정국 대처와 당 운영방식에서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우선 11월 중순 당 혁신안 처리 후 예정되어 있는 당직개편 과정에서 그동안 일부 핵심측근들에 지나치게 의존하던 당무 스타일을 버리고 반박(反朴)·비박(非朴) 진영 인사들도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중도 성향의 한 3선 중진은 “내달 당직개편에서도 박 대표가 김무성 사무총장과 유승민 당선자, 전여옥 대변인 등 이른바 ‘측근 3인방’에 의존하는 인사를 한다면 당내 반발이 예상외로 심할 수 있다”며 “김 총장이야 두 번의 재·보선을 승리로 이끄는 데 공이 큰 만큼 유임시킨다 하더라도 최소한 당 안팎에서 구설에 시달려온 나머지 측근 두 사람은 교체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당내 소장·개혁그룹에선 박 대표가 향후 정국운영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요구가 많다. 재선거 과정에서 박 대표가 ‘장외투쟁 불사’까지 거론하며 던진 국가 정체성 논쟁이 별반 여론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이 문제를 계속 이슈로 끌고나가서는 곤란하다는 주장이 주류다. 당내 대권주자인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한나라당이 보수를 표방하면 다음 집권은 없다”(10월26일 고려대 특강)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 386 의원은 “국가 정체성 논쟁은 동국대 강정구 교수 발언과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이라는 국지적 사안을 뜬금없이 ‘담론화’(談論化)하려 한 탓에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박 대표가 재선거 이후에도 ‘정체성 수호를 위한 구국운동을 일상화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자칫 잘못하면 ‘한나라당=수구 꼴통’이란 낙인을 스스로 찍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이어 “노 대통령이 재선거 결과에 대해 ‘나에 대한 평가로 받아들이겠다’고 한 부분을 당 지도부가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 특히 ‘구도와 바람’을 중시하는 노 대통령이 새로운 ‘그랜드 디자인’을 구상중이란 점을 청와대 관계자들이 공언하고 있는 만큼 한나라당도 구태의연한 이념논쟁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집권을 위한 비전과 기반 확충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대표 등 지도부는 이 같은 요구에 대해 “당 발전을 위한 충정에서 나온 제안은 겸허히 수용할 것”(김무성 사무총장)이라는 입장을 보이면서도 독배론 등이 ‘박근혜 흔들기’의 또 다른 방편으로 활용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보이고 있다.
한 측근 당직자는 “당내 일각에서 제기하는 독배론에 대해 박 대표는 ‘재선거 승리에 도취돼 자만하지 말자’는 긍정적 메시지로 이해하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독배론을 주장하는 측에서 ‘더욱 잘하자’는 선을 넘어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해당행위로 변질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선을 분명히 그었다.
이 당직자는 또 “독배론을 주장하는 일부 당내 인사들 사이에 ‘이번 재선거에선 박풍(朴風)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더라’는 등의 얘기를 하는데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선거전에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궁금하다”며 “전여옥 대변인의 말처럼 ‘수명이 2~3년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혼신을 다한’ 박 대표의 노고를 치하하지는 못할망정 뒤에서 ‘흠집내기’나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