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대구에서만큼은 ‘공천 지분’을 행사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은 박 대통령이 지난 9월 7일 대구시 서문시장을 방문해 상인들과 인사하는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현재 새누리당은 차기 총선에 적용할 공천 규정에 대해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다만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주겠다’. 즉, 국민이 당의 후보를 뽑을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겠다는 쪽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현행 새누리당 당헌·당규에는 후보를 뽑을 때 국민과 당원의 의사반영 비율을 50 대 50으로 한다고 돼 있다. 이 비율을 조정할지 말지 결정할 일만 남았다.
문제는 전략공천이다. ‘박정희-전두환(대구공고 출신)-노태우-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을 배출한 TK는 새누리당의 토대이자 텃밭이어서 ‘공천=당선’의 공식이 100% 적용되는 곳이다. 이곳에 전략공천을 한다는 것은 이 공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자가 자기 사람을 심는다는 뜻이 된다.
문제는 청와대나 정부, 혹은 공공기관 출신 인사들이 직을 던지고 TK 출마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벌써 수십 명에 이른다. 한 달여 전부터 친박계가 “우선추천지역에 예외는 없다”며 TK에도 전략공천을 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비박계가 “TK 같은 여당 강세지역은 예외”라며 전략공천 불가로 맞서왔던 이유가 서서히 드러나는 꼴이다.
유승민 의원. 일요신문DB
그런데 최근 대구에서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물갈이 대상으로 떠오른 현역 의원들도 “해볼 만하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도전자들 역시 바닥을 다지며 공천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천은 내가 받는다”로 서로 이야기하고 다닌다는 얘기다.
달라진 풍경은 ‘공중전’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공천을 받고자 여의도에 진을 치고 당 수뇌부를 ‘알현’하려는 행태는 자취를 감췄고 오로지 바닥을 누비며 표심에 읍소하는 ‘백병전’이 이어지고 있다. 물갈이 리스트에 오른 한 의원은 현역들이 공천을 받을 것이라 확신하는 세 가지 논리를 설파했다.
“전략공천 카드를 너무 일찍 꺼낸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오픈프라이머리가 어려워지긴 했지만 공천 규정에 대한 논의가 워낙 오래 이어져 왔기 때문에 유권자들도 우리 대구 공천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이번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서 보듯 대구에서도 대통령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전폭적으로 밀어주는 것은 아니다.”
전략공천은 사실 ‘조커’와 같다. 상대방이 어떤 패를 쥐고 있어도 이길 수 있는 절대필승 카드다. 하지만 이 공천 조커도 던져야 할 절대 타이밍이 있는데 이를 놓쳤다는 뜻이다. 지역 정치권의 한 인사는 “총선까지 5개월 가까이 남았는데 워낙 좁은 동네이니 이 정도 기간이면 나올 거 다 나온다. 지역 언론도 새 인물에 대한 청문회 수준의 현미경 검증을 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했다.
대구의 다른 한 의원은 “참 복잡미묘하다”며 “박근혜가 잘했다 유승민이 잘했다 하는 분위기도 있고, 이번 정부를 성공시켜야 한다면서도 유승민 같은 사람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박근혜가 공천하면 찍어주자는 말도 있지만 또 전략공천하면 ‘확 마 조지뿔끼다’하는 쪽도 있다. ‘오로지 박근혜’라고 하던 지난 총선, 지난 대선의 분위기하고는 많이 다르다”고 했다.
대구 현역들의 분위기는 이렇지만, 도전자들도 패기만만하다. 전·현직 장관과 청와대 인사들의 출마설 중 본인 입으로 확인된 것은 현재 하나도 없다. 하지만 20대 총선에 첫 출마를 예고한 일부 출마 예상자들은 최근 “청와대가 나가라고 했다”면서 지역을 누비고 있다고 한다.
한 출마 예상자는 “시그널이 너무 많았지 않느냐. 굳이 니가 나가라 여기는 또 니가 나가라 이러지 않더라도 올해 대구를 물갈이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복선이 곳곳에 깔려 있다”면서 “공천도 확신하고 당선도 확신한다. 우리는 ‘무조건 박근혜’를 외치고 다닐 것”이라고 말했다.
현 정부 출범에 이렇다 할 공이 없는 인사들, 즉 친박이나 신박(신친박), 요즘 말로 진박(진짜 친박)이 아니면서도 박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다고 소문을 내는 후보들이 많아지고 있다 한다. 정치권의 한 소식통은 “친박계가 군불을 때고 박 대통령이 행동개시를 명하고 친박계가 봉기하는 시나리오는 사실상 현 정부에서는 공식과도 같다. 유승민 사퇴가 바로 그런 식으로 이뤄졌다”며 “그 이후 박 대통령의 시그널은 대구를 물갈이하겠다는 것이었다. 친박계가 거세게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 대통령이 대구와 경주를 방문하면서 지역 국회의원을 초청하지 않은 점, 친박계 핵심인 윤상현 조원진 의원이 유 의원의 부친상에 찾아와 ‘TK 물갈이론’을 설파한 점, 이어 박 대통령이 “국민을 위한 진실한 사람들만을 선택해달라”며 총선 개입 여지가 있는 발언을 국무회의석상에서 한 점 등에 미뤄 박 대통령이 대구에서만큼은 ‘공천 지분’을 행사할 것이란 이야기가 회자하고 있다.
특히 유 의원 부친상에 조화를 보내지 않고 청와대 인사들의 문상도 일절 없어 대구 정가에서는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친박계 중진 의원은 “박 대통령이 직접 사인을 주지는 않는다”면서도 “하지만 (저도) 지난 지방선거에서 단체장 출마를 하라는 신호를 누구로부터 받았는데 그런 식으로 에둘러 신호가 다 들어갈 수는 있다고 본다”고 했다.
정치권에서 ‘지분’은 곧 지지율과 같다. 현재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새누리당 지지율보다 높아서 박 대통령이 “내 덕이 크니 내 지분을 내놔라”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당 지지율이 역전하면 그 반대가 된다. 일각에서는 총선 직전의 경제 상황, 현 정부의 공약 이행도 및 각종 정책에 대한 평가, 사분오열된 새정치민주연합의 총선 직전 당내 분위기, 야권 결집 여부 등이 얽히고설켜 전략공천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 관측하고 있다. 그래도 총선까지 5개월 가까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