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일요신문DB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상도동계는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동고동계와 더불어 민주화에서 양대산맥을 이뤘고, 그 ‘양김(兩金) 시대’의 정치적 유산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도동계는 YS의 자택이 위치한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서 유래된다. 상도동계의 계보는 현재 대한민국 정치 주역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병석·정병국 의원, 전직 의원들로는 김동영 의원과 YS의 영장사진을 제일 먼저 갖고 왔다는 문정수 전 부산시장까지 포함된다.
YS가 물러난 1998년 이후 현재까지도 정치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상도동계의 정치 협력자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동교동계 주역들도 22일 YS의 서거에 깊은 애도를 표했다.
대표적 동교동계 인사로 꼽히는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이날 YS 빈소를 방문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한다”면서 “그는 탁월한 야당 지도자로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고, 두 분은 협력과 경쟁을 통해 국가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실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정치적 고비를 함께 이겨냈던 ‘애증관계’로 불린다.
경남 거제에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YS와 전남 신안의 외딴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DJ. 시작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정치계에 입문하며 인연을 맺는다.
YS와 DJ는 박정희정부의 군부독재에 맞서며 한국 야당사의 대표적 정치인으로 자리매김 하며 협력과 경쟁을 이어갔다.
두 사람의 첫 경쟁은 1968년 신민단 원내총무 경선이었다. 승리는 YS에게 돌아가는듯 했지만,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DJ의 역전승으로 첫 경쟁은 끝이 났다.
군사정부 시절 두 사람은 정치적 고비를 겪었으나 군사정권에 맞서며 한국 야당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이후 1985년, ‘5·18 민주화운동’으로 망명했던 DJ가 귀국하고 YS가 결성한 민주화추진협의회로 두 사람은 직선제 개헌 운동과 민주화항쟁을 주도했다. 군사 정권의 그늘에 가려졌던 두 사람의 복귀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1987년을 기점으로 YS와 DJ는 협력보다는 경쟁의 길을 걷게 된다. YS는 그 해 대선에서 2위를 차지하며 DJ보다 우위를 서는 모습을 보였지만, 1988년 13대 총선에서 자신이 이끌던 통일민주당이 3당으로 전락하자 1990년 민자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선언하게 된다.
사진=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를 찾은 김종필 총재. 출처= 일요신문DB
이후 YS는 민자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고, 1992년 대선에서 DJ와의 대결 끝에 대권을 거머쥐게 됐다.
대선에서 패배한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제1야당 대표로 정계에 복귀했다. 1997년 그는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이 과정에서 YS는 DJ의 비자금 의혹 사건에 대해 수사를 유보시키며 DJ 대선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양김은 서로를 ‘배신자’로 부르며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였다. DJ는 YS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YS도 DJ의 노벨상 수상을 평가절하하며 갈림길을 걸어간 것이다.
특히 김대중정부 당시 YS의 아들 현철 씨의 사면문제를 놓고 두 사람의 골은 깊어졌다. DJ의 문민정부 비리청산작업이 본격화되며 YS의 측근들이 법적 심판대에 오르며 두 사람의 관계는 끝을 보이는 듯 했다.
두 사람이 화해하게 된 것은 2009년 YS가 서거 직전 병상에 있던 DJ를 찾아가 문병을 하면서다. YS는 취재진들에게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말하며 사실상 화해가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YS는 생전에 스스로 DJ와의 관계에 대해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자 협력관계”라고 표현했다.
DJ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는 두 사람을 ‘물과 기름’ 같다고 표현했다. DJ에 이어 YS의 사망으로 ‘양김 시대’의 주역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