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법원에 들어서는 임동원(왼쪽) 신건 전 국정원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이 전 차장은 이미 3번이나 검찰의 조사를 받았으며 주로 상관이었던 신 전 원장의 혐의 사실에 대해 집중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이 전 차장의 추가 소환 조사 계획도 없었다며 사건의 파장이 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불법 도청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던 임·신 두 전직 원장측이나 ‘무리한 짓’이라고 비난하던 김 전대통령측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다. 사건의 시발은 검찰이 지난달 26일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을 불법 도청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 기소한 데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눈에 띄는 것은 그의 공소장이었다. 검찰은 공소장에 ‘김 전 차장은 임동원, 신건 전 국정원장과 공모했다’고 명시했던 것이다. 그후 지난 20일 동안 검찰과 두 전직 원장과의 힘겨루기 전쟁은 팽팽하게 전개됐다. 결국 지난 14일 사전구속영장 청구라는 검찰의 초강경 카드가 던져졌다. 정치권도 미처 예상치 못한 전격적인 강수였고, 일견 검찰의 승리였다. 하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분석이 더 우세하다. 더구나 이 전 차장의 자살로 두 전직 원장과 김 전대통령측의 반격이 더 거세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난 10월28일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검찰에 소환됐다. 검찰은 그가 피의자 신분임을 분명히 했다. 검찰은 또 “다음 주에는 신 전 원장을 소환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막상 그 다음 주였던 이 달 첫째 주에 신 전 원장의 소환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3일 이수일 전 국정원 2차장이 소환됐다. 이 전 차장은 김은성 전 차장에 이어서 2001년 11월부터 2003년 4월까지 DJ정권의 마지막 국정원 2차장을 지냈다. 그의 상관은 신 전 원장이었다. 신 전 원장의 보다 확실한 혐의를 잡기 위해 이 전 차장을 불렀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했다.
이때만 해도 검찰 내부의 분위기는 강경했으나 “그래도 구속까지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쪽이 우세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의 분위기가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11월 둘째주부터였다. 그 분위기는 검찰 수뇌부가 조성했다. 월요일이었던 지난 7일 정상명 검찰총장 내정자를 비롯한 5명의 고검장급 간부 수뇌부들이 원탁에 둘러앉은 것이다. 정 내정자는 총장으로 내정된 이후 총장실의 소파를 치우고 원탁 테이블을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사시 17회 동기들을 비롯한 검찰 수뇌부와 집단지도체제로 검찰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이날 원탁회의는 향후 ‘정상명호’ 검찰의 운영 방향을 알려주는 측면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 회의에는 정 내정자와 동기인 안대희 서울고검장, 임승관 부산고검장, 이종백 서울중앙지검장(고검장급)과 함께, 한 기수 아래인 홍경식 대전고검장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대검차장과 대구고검장은 공석중이고, 홍석조 광주고검장은 ‘안기부 X파일’ 연루설 등으로 불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사실상 두 전직 국정원장의 구속 여부를 두고 어느정도 검찰의 방향 설정이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일선 수사 검사들의 의견은 당연히 구속이 불가피하다는 쪽이었다. 하지만 불구속 의견도 분명히 있었다. 강정구 교수와 두산 박용성 회장 일가의 불구속에 비춰볼 때 그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고민에 대해 그나마 검찰 수뇌부가 적절한 시점에서 ‘가이드 라인’을 만들어준 셈이었다”고 밝혔다.
그 가이드 라인은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볼 때 두 전직 원장의 구속도 가능하지만, 검찰 조사에 최대한 협조하면서 불법 도청에 대해 혐의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면 불구속 처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얼핏 불구속 쪽에 무게중심을 두는 듯하지만, 도청 혐의를 부인하는 기존의 입장을 계속 고수할 경우 구속할 수도 있다는 일종의 엄포였던 셈이다.
5인 회동에서 내부 인사들의 개별 입장이 어떠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수사 지휘선상에 있는 이 지검장의 경우 일선 검사들의 강경한 입장을 일정 부분 대변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 정상명 검찰총장 | ||
사안의 심각성을 감지했음인지 검찰 수뇌부 회동 이후 두 전직 원장측의 움직임이 긴박해졌다.
동교동계 인사들과 잇달아 접촉을 가지는가 하면, DJ에게도 입장 전달을 꾀했다는 후문이다. 실제 정치권에서는 동교동계가 두 전직 원장의 구속 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을 DJ에게 전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8일 우리당 정세균 의장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은 내 정치적 계승자”라고 한 발언이 상당한 정치적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같은 날 검찰도 상당히 목소리에 힘이 실린 듯했다. “두 전직 원장을 사법처리키로 결론내렸다”면서 “두 전직 원장이 계속 혐의를 부인할 경우 구속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처음으로 구속에 무게중심을 두는 듯한 발언이 나왔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신 전 원장과는 달리 최소한 임 전 원장에 대해서는 불구속 수사 분위기가 검찰 내에서도 우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DJ 정권의 최대 공적인 ‘남북화해 전도사’라는 정치적 상징성 때문이었다. “불법 도·감청을 주도했다기보다는 관행상 묵인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얘기가 검찰에서 먼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은 임 전 원장의 태도에 내심 상당한 불쾌감을 표했다는 후문이다. 검찰 앞에서는 “불법적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애썼는데, 이런 일이 터져 유감스럽다”며 에둘러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다가도 막상 기자 앞에서는 “나는 도청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도청이 이뤄지는지조차도 몰랐다”고 전면 부인하자 상당히 어이없어 했다는 것.
검찰은 신 전 원장을 9일 소환해서 조사를 마쳤고, 사실상 이때 그의 구속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신 전 원장이 옛 부하 직원들에게 ‘검찰에서 한 진술을 번복할 것’을 요구했다는 관련자의 증언도 이 시기에 확보된 것으로 보인다. 검찰 내부에서는 “상대는 전직 국정원장들이다. 국정원이 어디냐. 잘못하다간 검찰만 완전히 낭패를 보게 된다”라는 위기감이 나왔고,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어 구속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개진되기 시작했다.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의 한 관계자는 “지난 10월 중순 천정배 법무장관의 지휘권 파동이 이번 사건에 크게 작용한 면이 있다”면서 “검찰이 구속 의견을 냈는데, 천 장관이 또 불구속 지휘권을 발동하기에는 몹시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검찰로서도 지난 지휘권 파동을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을 것이라는 전언이다. 정 내정자 역시 ‘코드인사’라는 일부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일선 검찰의 강경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검찰의 구속 결정은 주말을 앞둔 지난 11일에 최종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날 검찰이 김 전 차장과 이 전 차장을 또다시 불러들여 두 전직 원장의 구속영장 청구를 위한 마지막 정리 작업을 했다는 후문이다.
검찰은 천 장관에게 구속의 불가피성을 보고했다. 천 장관 역시 검찰의 구속 방침을 보고받고는 곧바로 청와대에 이를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정 내정자와 천 장관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적어도 임명이 확정되지 않은 총장 내정자에게 천 장관이 또다시 강경한 뜻을 표하긴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관측이 우세하다. 노 대통령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14일 전광석화 같은 검찰의 사전구속영장 청구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정치권이 꼼짝없이 당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렇다고 현재 검찰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전 차장의 자살로 상황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형국이다.
두 전직 원장의 대반격이 준비될 것이란 예상과 함께 여기에는 여당과 국정원이 함께 가세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자칫 검찰이 고립무원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향후 파장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인물은 역시 김은성 전 차장이다. 검찰이 그의 진술에 상당 부분 의존했던 만큼, 두 전직 원장측에선 김 전 차장의 비도덕성과 기회주의적 처신 행각을 집중 부각한다면 재판에서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