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창용(27·삼성)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전날 밤(12월27일) 이미 약속된 인터뷰를 연기하고 불현듯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던 터라 인연과 악연을 오락가락하고 있는 김응용 감독과의 면담 뒷얘기가 무척 궁금했었다. 기자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휴대폰까지 꺼놓았다는 임창용은 문전박대를 각오하고 연락 없이 김 감독을 찾아갔다가 처음엔 정말 문전박대 당했다며 환하게 웃는다.
결국 나중에 커피잔을 앞에 두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 어떻게 해서 트레이드 얘기가 흘러나왔는지, 언론에 소개된 기사 중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다는 점, 그리고 성급히 감정적인 인터뷰를 했던 부분에 대해 임창용이 먼저 잘못을 빌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 한 해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과 사실혼 관계인 약혼녀와의 파경, 메이저리그 진출 좌절, 그리고 김응용 감독과의 트레이드 신경전 등 다사다난, 파란만장, 우여곡절의 해를 보낸 임창용과의 ‘취중토크’는 오랜 기다림 끝에 이뤄질 수 있었다.
술이요? 소주 1병이면 많이 마신 거예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분위기만 즐길 뿐이지. 내가 여잘 좋아한다구요? 사실 남자치고 여자 싫어하는 사람 있나요? 하지만 방탕할 만큼 무절제하진 않았어요. 나이트 가서 부킹만 해도 여자랑 갈 때까지 갔다는 소문이 나더라구요.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요.”
임창용은 푸에르토리코에서 귀국하기 며칠 전에 인터넷을 통해 국내 신문을 검색할 수 있었다. 그때 읽었던 기사들 중에 김응용 감독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었다. “나 때문에 팀 분위기가 엉망이고 단합이 안된다는 글을 읽는데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더라구요. 4년 동안 삼성에 몸담고 있으면서 정말 열심히 던졌는데 너무하다 싶은 거예요. 내가 팀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차라리 그럴 바엔 트레이드 시켜달라고 말한 거죠. 그런데 김 감독은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임창용은 제주도까지 김 감독을 찾아간 이유에 대해 오해를 풀고 싶었고 비록 메이저리그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귀국 후 소속 감독한테 인사를 하는 게 예의인 것 같아 어려운 걸음을 뗐다고 한다.
“잘 표현을 하지 않는 분이시잖아요. 선수 입장에선 미국 진출 좌절에 따른 충격과 패배감을 위로 받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도 듣고 싶었는데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어요. 이미 트레이드하기로 구단에서 방침을 정했기 때문에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면 팀이 결정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좀 서운하대요. 사실 내가 신인 때는 김 감독님이 무척 귀여워해주셨거든요.”
잠시 메이저리그 진출이 불발된 사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적료 3백만달러를 요구한 구단측의 제시액과, 미국 스카우트들이 본 임창용의 몸값 65만달러와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사실 임창용은 내심 기대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있었고 현지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본 결과 자신을 원한 팀에선 65만달러를 최고가로 써냈고, 삼성에선 헐값에 팔 수 없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돈 많은 구단에서 왜 3백만달러를 고집했는지 이해가 안가요. 아무래도 나와 다른 팀의 선수를 맞교환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아쉬움이 많이 남죠. 지금처럼 복잡한 상황에선 외국 나가 모든 걸 잊고 야구에만 전념하고 싶었는데….”
임창용은 어린 나이에 프로에 입단해서 오로지 야구만 알고 지내온 시간들에 보람도 느끼지만 때론 후회되는 부분이 많다고 한다. 야구 외엔 아는 지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명문 해태에 입단, 2군에서부터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2군 감독이었던 김성근 감독을 만나 호된 시집살이를 하면서 조금씩 야구에 싫증이 났다며 신인 시절의 기억을 꺼낸다.
“정말 연습하기가 싫더라구요. 게임 나가면 재밌는데 훈련하는 건 진짜 재미없었어요. 그래서 하루 이틀 훈련을 게을리했더니 감독님이 ‘너 같은 놈 필요 없으니까 집에 가라’고 호통을 치시더라구요. 속으로 잘됐다 싶어서 그냥 집으로 갔죠. 그런데 집에 가서 생각해보니까 좋아할 일이 아닌 거였어요.”
바로 김 감독의 숙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김 감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3시간 가량 노크를 하고 버티니까 나중에서야 문을 열고선 이런 말을 꺼냈다고 한다. “창용아, 딱 1년만 참고 야구해 보자.”
“아마추어에서 진짜 프로가 된 기분이었어요. 1년 동안 감독님 밑에서 너무나 많은 걸 배웠거든요. 무서울 땐 정말 얼음장 같이 차갑지만 선수를 감동시키고 동기부여를 하면서 야구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하는 분이세요.”
사생활을 화제 삼아 이야기를 나누다 “27년 동안 살면서 가장 사랑했던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주저 없이 “현아죠”라고 대답한다. 파경설로 한때 매스컴을 시끄럽게 했던 약혼녀를 가장 사랑했다는 임창용한테 자연스럽게 ‘그 문제’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사랑했으니까 결혼까지 생각한 거예요. 전 어디에 구속되는 걸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현아를 만나면서 같이 살고 싶어졌어요. 사실 사치를 했든 돈을 함부로 썼든, 그런 부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문제는 나를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으셨던 부모님을 싫어했다는 거죠. 사랑한 여자지만 부모님이 개입되니까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
매스컴을 통해 열띤 폭로전을 벌이며 두 사람 모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지만 그래도 임창용은 약혼녀에 대한 미움을 털려고 애썼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기 때문에 더 이상의 원망이나 미련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단정지은 듯했다.
“다시 결혼할 거예요?” “아니요. 혼자 살려구요. 만약 30대 중반을 넘어서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는 여자가 나타난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그 전에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2시간 가량 인터뷰를 했는데 끝날 때쯤 보니까 반도 못 비웠다. ‘취중토크’ 시작한 이래 상대방 앞에서 ‘승리의 깃발’을 꽂기는 처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