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30일 노무현 대통령이 출입기자단과 함께 북악산에 오른 후 정상에 있는 바위에서 내려오고 있다. 노 대통령은 당시 “내년 초 ‘국가 미래 과제’에 대해 해결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여권 핵심부의 움직임에 정통한 한 인사가 물었다. 그는 답변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계산이 이미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는 최근 노 대통령이 일부 여당 의원들을 청와대로 초치해 강조했던 ‘회심의 한 건’ 즉 ‘연정론 실패 이후의 만회 전략’에 대한 큰 그림이 이미 그려졌고, 이제 실행만이 남았다는 얘기도 함께 흘렸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의 한판 승부수, 정치 지형을 뒤흔들고 지각 대변동을 일으킬 초강수는 과연 뭘까. 그것은 한마디로 ‘개헌’이다. 권력의 분산과 분점을 골자로 하는 개헌구상은 이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날만 기다리는 중이다.
12월 초 시내 한 음식점에서 열린 여당의 핵심 멤버 모임. 기획 파트와 정세분석 분야의 보고가 있은 뒤 잠시 노 대통령의 근황에 대한 얘기들이 이어졌다. A의원이 말문을 열었다.
“근데 요즘 대통령이 왜 이렇게 조용한 겁니까. 공개 행사도 그렇고 일정도 팍 줄었습니다. 너무 조용해지니까 좀 이상해. 뭔 일이 있는 건가요.”
B의원이 거들었다. “정치나 정책 현안은 죄다 이해찬 총리에게 넘기는 것 같습니다. 말수도 줄었고…. 뭐 말씀을 가급적 아끼시는 게 우리한테는 좋은 거긴 하죠.” 좌중에 “와∼”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좌장격인 C의원의 한마디가 잠시의 소란을 잠재웠다.
“조용하다는 것, 뒤집어 보면 ‘뭔가 진행중’이라는 뜻 아닐까요. 구상이 다 끝났다는 거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계산이 다 끝났다고 봐야죠.”
B의원이 물었다. “그 끝났다는 계산이란 게 뭐죠.” C의원이 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개헌 말고 뭐가 있겠어요.” 순간 깊은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노 대통령의 ‘침묵’은 이미 한 달여 되어 간다. 요즘 여권 내에서는 노 대통령이 여론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말을 많이 들으려고 하니까 자연 자신의 말은 줄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건 단순한 태도의 변화가 아니다. 여론 지지도를 의식한 ‘정치 쇼’가 아니다. 노 대통령은 타고난 정치인이다. 여론의 일고일저에 일희일비할 그가 아니다. 그런 것은 이미 접은 지 오래됐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투 스텝 진전을 위한 원 스텝 후퇴일 것”이라고 노 대통령의 변화를 설명했다. 정치 경험이 많은 여권 인사들은 실제로 “노 대통령이 깊은 구상에 빠져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 내부의 소식에 정통한 이 인사는 “깊은 구상은 곧 개헌을 뜻한다”고 잘라 말했다.
노 대통령이 지난 10월 말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산행 뒤에 “내년 초 ‘국가 미래 과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겠다”고 밝힌 것, 지근거리에서 노 대통령을 모시는 김두관 청와대 정무특보가 “노 대통령이 내년에 향후 긴 흐름으로 국정 구상을 내놓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 그것이 결국은 개헌구상으로 통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또 다른 여권 인사는 “노 대통령의 최종 카드는 결국 대통령에 의한 개헌안 발의”라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대통령에겐 대통령만이 구사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있으며 대통령만의 카드라는 것은 곧 정치 문제를 헌법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쉽게 말하자면 현 국면에서의 대통령만의 카드는 곧 ‘대통령발 개헌’ 카드에 다름 아니다.
그럼 개헌안 추진의 논리와 그 내용, 그리고 추진 시기는 어떻게 될까. 여권 주요 관계자들의 예상 등을 토대로 짚어보면 이렇다.
첫째, 개헌안을 추진하는 논리. 노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인 현행 헌법이 ‘민주 대 반민주’ 또는 ‘독재 대 반독재’라는 흐름 속에서 독재와 장기집권의 폐단을 막기 위해 ‘대통령직선제’와 ‘5년 단임제’에 초점을 맞춰 개정된 것이라는 논리를 펼 것으로 보인다.
현행 헌법이 국민들의 피와 땀이 서린 6월 민주항쟁의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지만 당시 정치지도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토대로 개정된 측면이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강조할 가능성이 크다. 또 그 헌법으로 1997년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고 2003년 참여정부가 출범했기 때문에 현행 헌법은 그 사명과 소임을 완수했다는 설명도 곁들여진다.
노 대통령은 이어 ‘이젠 더욱 다원화하고 산업화한 21세기 미래를 담보할 헌법이 필요하며 현행 헌법은 이를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할 것으로 예상된다. 즉 글로벌시대를 주도하는 국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시대를 대비하는 정부, 분권과 균형발전을 담아낼 수 있는 사회상 등을 새 헌법에 담아야 한다는 논리인 셈이다.
둘째, 개헌안에 무엇이 담기나. 무엇보다 권력구조와 권력분립의 문제가 담길 것이다.
노 대통령은 ‘5년 단임제의 폐단은 몇 차례의 정권교체를 통해서 확인됐고 집권 2년차가 지나면 레임덕현상으로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할 수가 없다’는 논리로 4년 중임 대통령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역설할 가능성이 크다. 또 ‘정·부통령제냐 분권형 대통령제냐’ 하는 문제도 주요 내용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헌법 개정 사항은 아니라도 국회의원 선거구제 문제 역시 헌법 개정시 논의주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셋째, 예상되는 개헌 로드맵. 2007년 대통령선거로부터 역산하면 답이 나온다. 우선 노 대통령은 위에 제시한 화두들을 해결하기 위한 개헌 일정을 내년 초쯤 밝힐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내년 지방선거 후엔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고유권한을 행사하여 준비된 개헌안을 실제로 발의하는 단계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권 내에서는 이미 ‘2006년 상반기의 기초연구단계-2006년 후반기 및 2007년 상반기의 개정협상단계’의 2단계 협상안을 구상하고 있기도 하다. 2007년 봄 국회에서 개헌안이 통과되면 정치권은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합종연횡한다. 정치지형이 대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