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3년 11월3일 김대중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설명을 듣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
정치권과 정부 일각에선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향후 역할을 고려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김대중도서관’과 유사한 형태의 연구소를 별도로 마련할 계획”이라는 관측이 흘러나오고 있다. 여기서 ‘노 대통령의 연구소’로 물망에 오르내리는 곳은 오는 3월께에 개원할 예정인 ‘제주평화연구원’(평화연구원).
평화연구원은 대통령 자문기구인 동북아시대위원회가 지난 2004년 처음 기획했고, 이후 외교통상부가 운영 예산 신청 등 실무를 주도하고 있는 연구소. 바로 이 평화연구원이 노 대통령의 ‘퇴임 대비 기관’이라는 주장이 여권 일각에서 조심스레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평화연구원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던 문정인 전 동북아시대위원장은 “전직 대통령(노무현)이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며 항간의 관측을 강하게 일축했다. 과연 평화연구원과 노 대통령의 ‘포스트 플랜’은 전혀 무관한 것일까.
평화연구원의 밑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4년 10월. 문정인 당시 동북아시대위원장은 노 대통령에게 제주평화연구원 설립에 관한 초안을 보고했다. 이후 2005년 초 노 대통령이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선언하면서 평화연구원 프로젝트가 본격 진행됐다.
평화연구원의 첫 기획자인 문 전 위원장은 지난 12월30일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우리나라를 동북아 중심국가로 만들고 제주도를 평화의 거점으로 조성하기 위해 평화연구원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평화연구원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동서문화센터는 미국 국무부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고 있다. 평화연구원이 외교통상부 예산으로 운영기금을 조성하는 것과 흡사한 형태. 평화연구원은 향후 스웨덴의 스톡홀름과 노르웨이 오슬로의 평화연구소처럼 연구원의 절반 정도를 외국인 전문가로 채울 계획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동북아문제를 공유할 수 있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의 전문가들이 이 연구원에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북한의 전문가도 동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문 전 위원장의 설명.
평화연구원이 정·관가에서 수면위로 떠오른 시점은 2005년 4월 말. 외교부가 “정부 차원의 제주 세계평화의 섬 사업을 총 지휘할 평화연구원이 2006년 상반기 제주에 설립될 것”이라고 발표하면서부터다. 외교부는 평화연구원을 민간연구기관으로 정한 까닭에 대해 “국책연구기관으로 정할 경우 정부 정책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원 조직은 원장과 부원장, 연구원 7명, 대외협력실과 행정실 직원 등을 모두 포함해 15명으로 꾸려질 예정. 외교부 관계자는 “이 연구원은 국제기구와 국제회의를 유치하고, 제주평화포럼 운영, 평화지수 계발, 평화연구와 출판, 국제 교류 활동 등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설립재원은 국고로 2008년까지 해마다 50억원씩 1백50억원, 지방비(제주도 부담)로 50억원 등 모두 2백억원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우선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 내에 있는 제주국제평화센터 2층(8백여 평)에 입주할 예정이며, 향후 별도의 건물을 마련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평화연구원 프로젝트는 예산 확보 문제로 초기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외교부는 이 연구원 운영 기금 조성을 위해 국회에 50억원의 예산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2005년 11월 초 국회 소관 상임위인 통일외교통상위에서 20억원을 삭감하면서 재원 확보에 차질을 빚었다. 특히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가 강했다. 한나라당은 “평화연구원 설립이 외교부의 업무와 무관하고 현안사업도 아니다”며 “외교부 산하에 유사한 연구기관인 외교안보연구원과 통일연구원, 세종연구소 등이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평화연구원은 불필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국회 예산정책처도 “외교부가 신청한 평화연구원 설립 연구 지원 50억원은 민간자본을 활용하거나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는 다른 기관으로 이전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에 한나라당은 평화연구원이 제주도의 세계평화의 섬 지정에 따른 핵심 사업 가운데 하나인 점을 감안해서 원안을 수용했다. 그리고 12월30일 사립학교법 개정안에 반대하며 장외투쟁을 벌이고 있는 한나라당이 불참한 가운데 2006년도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평화연구원의 2006년도 운영 기금도 확보된 셈이다.
그런데 이 같은 우여곡절을 겪은 평화연구원이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대비 기관’이라는 관측이 정치권과 정부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권의 한 관계자는 “노무현 대통령은 평소 DJ의 노벨상 수상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특히 DJ가 퇴임한 이후 ‘김대중도서관’에 머물며 국내외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를 벤치마킹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에 문정인 (전) 위원장이 노 대통령이 퇴임한 후 활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평화연구원을 구상했던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퇴임 후 평화연구원의 원장이나 고문으로 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도 “문 위원장이 여러 연구기관의 규정과 운영 등에 대해 면밀히 검토했던 것으로 안다”며 “지방에 위치한 모 연구기관은 ‘고문직을 국가원수급에 해당하는 자가 맡을 수 있다’고 규정돼 있는데 이를 (문 전 위원장이) 참고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 전 위원장은 이런 주장과 관련해 “대통령이 재임중인 상황에서 퇴임 후 거취에 대해 벌써부터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불경스러운 일”이라며 불쾌해했다. 그러면서 그는 “평화연구원은 전직 대통령이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고 했다. ‘평화연구원=대통령 퇴임 대비 기관’이라는 일각의 관측을 일축한 것.
그는 또 “(평화연구원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하는 사업이다. 정부 예산 1백50억원을 연구원 운영기금으로 모두 확보한다 해도 이자 수입은 연간 4억원 정도에 불과하다”며 “연구원 직원들이 몇 명인데 대통령까지 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노 대통령이 퇴임 이후 연구원의 초청으로 가끔 강연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구원 원장’은 불가능하지만 ‘초청 강사’는 가능할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노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2년여 남아 있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대통령의 퇴임 후 거취에 대한 구구한 관측이 정치권에서 심심찮게 나돌고 있다. 노 대통령이 대통령직에 대해 마음을 비운 상태지만 향후 전임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에 대해선 진지하게 고민중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노 대통령은 2005년 8월 “퇴임하면 귀향마을 한 군데로 들어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언급했던 바로 그 ‘귀향마을’이 혹시 평화연구원이 있는 제주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