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는 2007년 대선을 위한 ‘준비기’로 2004년 17대 총선 이후 국지전을 벌여온 정치권 내 각 세력들이 차기 권력의 향배를 놓고 정면격돌할 것으로 예상된다. 연초부터 사립학교법 강행처리의 여파로 한나라당이 장외투쟁을 계속 벌이는 등 정국 주도권 장악을 위한 여야의 벼랑끝 대치가 이어지고 있는 데다 열린우리당 전당대회(2월18일)→5·31 지방선거→한나라당 전당대회(6~7월께) 등 주요 정치적 계기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의 투쟁’ 끝은 어디
신년 정국은 우선 작금의 ‘장외정국’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풀릴 것인가에 의해 기본 방향이 설정된다. ‘키’(Key)는 외형상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 대표가 국회를 전면 보이콧하면서까지 사학법 무효화에 남다른 결기를 보이면서 당내에 “여차하면 지방선거 때까지 장외투쟁을 계속할 수도 있다”(엄호성 전략기획본부장) 등의 ‘초(超) 강경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여권의 일정한 양보가 없는 한 박 대표가 ‘회군’(回軍)을 선언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정치적 판단이나 계산에서가 아니라 ‘소신’에 따라 장외투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한 핵심당직자는 “열린우리당이 2월 전당대회 후에 사학법 재개정을 약속하는 등의 가시적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한나라당이 국회로 들어갈 여지는 더욱 더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올 한 해 정국은 문자 그대로 ‘파행의 연속’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최근의 분위기로 보면 노무현 대통령 등 여권 수뇌부가 한나라당의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개혁입법으로 내세운 사학법 개정안을 천신만고 끝에 국회에서 통과시켰는데 이를 되물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을 달래자고 사학법 재개정을 약속할 경우 모처럼 재결집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전통적 지지층이 흔들림은 물론 정권 차원의 정당성과 권위도 훼손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한 핵심당직자는 “김영삼 정권이 96년 말 노동법을 강행처리했다가 여론에 밀려 무효화한 후 내리막길을 걸었던 교훈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사학법 개정은 명분이 분명하고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노동법 파동’에서처럼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여권이든 한나라당이든 ‘정국 표류’가 장기화될 경우 자칫 공멸(共滅)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어 1월 중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새 원내대표가 선출되면 정상화 교섭이 이뤄질 것이란 관측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만약 양측간 협상이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병술 정국’은 내내 ‘시계(視界) 제로(Zero)’의 상태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김 진검승부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2·18 전당대회는 여권의 대선 풍향계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유력 대권주자인 정동영 통일·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당으로 복귀해 ‘진검(眞劍) 승부’를 펼치겠다고 나선 만큼 결과에 따라 여권 내 권력지형이 새롭게 그려짐은 물론 정치권 전반에도 간단치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20%를 밑도는 지지율에 고민하고 있는 열린우리당으로선 이번 전대의 ‘흥행’에 그야말로 사활을 걸어야 할 처지다. ‘역동성’이 최대 무기인 여권으로서는 ‘전대 효과’를 최대한 살려 지지층을 결집해 내면서 지지율 반전과 함께 지방선거 승리를 향한 디딤돌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鄭)-김(金) 대전’과 이른바 ‘제3후보군’의 지도부 경선 가세 움직임도 결국은 전대를 발판 삼아 회생의 길을 찾겠다는 목적에서 비롯됐다. 특히 정·김 장관으로선 전대에서 당권 장악에 성공하면 지방선거와 정치권 ‘새판짜기’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2·18 전대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예상외로 흥행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다른 카드’가 사실상 없는 데다 전대 이후엔 지방선거 때까지 뚜렷한 정국 반전의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당·청(黨靑) 간 갈등이 급격히 증폭될 가능성이 높고 최악의 경우 여권 내 균열로 이어질 것이란 시나리오도 나온다.
▲ 고건 전 총리 | ||
5월31일 치러지는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병술 정국’의 최대 분수령이다. 2004년 17대 총선 이후 2년 만에 치러지는 전국단위 선거이자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민심의 소재를 파악하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선거의 결과에 따라 정국 주도권의 향배가 정해짐은 물론 각 당의 존립과 직결된 ‘빅뱅’ 수준의 정치권 재편 움직임이 뒤따를 것이라는 예상이다.
여권의 입장에선 노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중후반 평가라는 성격과 함께 ‘지방권력 교체’라는 숙원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고, 40%대를 넘나드는 지지율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한나라당으로선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10년 만에 정권탈환이란 ‘숙원’을 이룰 수 있는 결정적 국면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선거 성적표에 따라 한나라당 박 대표와 우리당의 새 ‘실세’ 당 의장의 향후 대권레이스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포인트다. 우선 열린우리당이 선거에 패배할 경우 노 대통령의 ‘레임 덕’은 회복 불가능의 국면으로 치달을 것으로 보인다. 사정이 이런 만큼 여권으로선 연초 개각과 2·18 전당대회를 통해 새롭게 진용을 꾸리고 지방선거에 전력투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나라당으로서도 수도권 3곳의 광역단체장 선거 중 한 곳에서라도 패배할 경우 당내 권력지형에 큰 변화를 겪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박 대표의 리더십이 심각한 훼손을 입을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강재섭 전 원내대표 등 다른 대권주자들, 원희룡 의원 등 소장파 차세대 주자들이 전면에 나서려 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관리형 대표’는 누구편
같은 맥락에서 6~7월께로 예정된 한나라당 전당대회도 향후 대권구도를 가늠할 수 있는 주요 계기란 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잠룡(潛龍)들이 서로 자신에게 우호적인 ‘관리형 대표’를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할 것이 확실한 데다 당내 각 계파들도 이때까지는 대권주자들 중 ‘택일’(擇一)을 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권레이스에서 지지율이나 당내 세력기반에서 ‘양강(兩强)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박 대표와 이명박 시장의 경우 지방선거 후보 공천 단계에서의 격돌에서부터 전대까지의 과정이 2007년 5월 대선후보 경선 결과를 좌우하게 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란 전망이다.
고건 어느 쪽으로 ‘고’
2005년 이미 맹아(萌芽)적 형태를 드러낸 정계개편도 새해에는 그 흐름이 급격히 빨라질 확률이 높다. 호남권에서 기반을 강화하고 있는 민주당이나 충청권의 새로운 ‘맹주’를 노리는 국민중심당 등이 우리당과의 통합-제휴 등 어떤 형태든 기존 정치판의 틀을 바꾸려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유력 차기대권주자인 고건 전 총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도 주요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특히 한때 ‘대세론’을 형성하다 최근 주춤거리는 듯한 양상을 맞은 고 전 총리의 경우 늦어도 2월 말 전엔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할 것이란 분석이 많다. 본인은 지난 연말까지 “아직 당적(黨籍)을 가질 생각이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대선 ‘전초전’의 성격이 짙은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더 이상 ‘유유자적한’ 태도를 견지하기는 어려우리란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이와 관련, 고 전 총리의 대중적 인기가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될 경우 그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온 정치권 각 당이 어떤 식으로든 ‘영입 경쟁’을 벌일 것이며 고 전 총리가 어느 수준의 제안에서 ‘OK 사인’을 던질지도 관심사다. 아울러 97년 대선에서의 이른바 ‘DJP(김대중-김종필) 연대’에 이어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이 고 전 총리를 중핵으로 하는 ‘신(新) 백제연합’을 결성할지 여부도 주목해야 할 대상이다.
개헌론 올해는 결론
그동안 사안의 ‘폭발성’ 때문에 좀처럼 동력을 얻지 못했던 개헌 논의도 2006년엔 결정적 국면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개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데다 17대 대선(2007년 12월)과 18대 총선(2008년 4월)이 1981년 이후 20여년 만에 비슷한 시기에 치러지는 ‘일정표’상 올해엔 개헌에 대해 가부간 결론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여야 전략통들 간에 단계별 추진 일정이 대략적으로 나와 있고 무엇보다 노 대통령의 임기 후반기 수세 국면 탈출의 비책(秘策)으로 ‘개헌 카드’를 꺼내들 것이란 관측도 이 같은 분석에 힘을 싣고 있다.
개헌 공론화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5·31 지방선거 이후가 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여권 수뇌부가 “내년 하반기가 되면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개헌 논의가 있어야 한다”(이해찬 총리·12월28일 총리실 송년 오찬)는 입장인 데다 한나라당 역시 지방선거 전엔 판을 흔들지 않겠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헌논의 자체가 정치·사회적 갈등요인을 내재하고 있고 여권 주도로 ‘개헌 드라이브’가 걸릴 경우 ‘개헌 저지선’인 3분의 1 이상인 1백27석의 의석을 가진 한나라당이 반발할 가능성이 커 합의 전망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대통령제를 전제로 벌써부터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대선주자들이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도 개헌정국의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 임기 말에 개헌이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라는 경험칙이 회자되고 있는 것도 개헌론의 공론화와 실제 개헌 가능성을 별개로 보는 시각이 많은 데서 연유한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