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술 좀 마시냐’고 물었더니 소주 2병을 맥주 1병으로 격감시키며 꼬리를 감추던 그는 스케줄상 낮에 진행하는 ‘취중토크’에 대해 의아해하면서도 충북 단양의 집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하는 정성을 보여줬다.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여자 태권도 헤비급(72kg급 이상)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미녀 전사’ 김순기(22·용인대). 기자와 첫 통화를 하던 지난달 27일 그는 이미 선수촌에서 나와 단양 집에서 달콤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한때 홍콩 영화감독으로부터 ‘1억 개런티’를 제의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대회기간 내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매서운 발차기 동작을 보노라면 영락없는 태권도 선수이지만, 김순기가 술자리에서 보여준 ‘평 소 모습’은 곱고 여린 그 또래의 여성들과 다 를 바가 없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번에 겪었던 해프닝 한 가지 말해도 되나요?”
금메달 획득 이후 치른 유명세에 대해 말하던 김순기는 소주를 원샷으로 마신 뒤(태권도세계에선 첫 잔을 원샷으로 마시는 게 ‘주도’라고 한다) 어느 방송국 PD로부터 받은 전화 내용을 털어놨다.
“제가 한때 영화에 출연했다는 이력 때문인지 기자분들로부터 정말 전화를 많이 받았어요. 그 중에서 모 방송국 PD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있었어요. 혹시 스포츠용품 CF를 해볼 의향이 없냐고 묻더라고요. 관심을 나타내자 CF감독한테 절 추천하고 싶다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뭘 물었는지 아세요? 남자랑 첫 키스를 해봤냐, 남자친구와 자 본 적 있느냐, 뭐 이런 이상한 내용들이었어요. 제가 황당해하자 얼마나 개방적인 성품인지 확인해보기 위해서라고 말하더군요. 세상에 정말 이상한 사람들 많더라고요.”
태권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그는 1998년 전국체전 여고부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거머쥐며 본격적으로 김순기란 이름을 알리게 됐다. 대학 1학년 때인 2000년에는 국내 대회를 석권하다시피하며 올림픽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 무렵 한·중 합작영화인 <여경특공대>에 주인공 양리칭과 함께 경찰 훈련을 받는 경찰대학생으로 출연하면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경특공대> 제작발표회 때 같이 출연하는 8명의 태권도 선수들과 함께 카메라 테스트를 받게 됐는데 액션영화 <예스마담>으로 유명한 홍콩의 고비 감독으로부터 “8명 중 네가 가장 마음에 든다. 나랑 같이 영화 한번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저한테 직접 개런티로 1억원을 주겠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액션 영화와 인연이 깊은 류병관 교수님(용인대)한테만 의사를 제시했는데 교수님이 ‘알아서’ 거절을 하셨다고 해요. 나중에서야 1억 운운하면 제가 운동을 포기하고 고비 감독을 쫓아갈까봐 돈 얘기는 살짝 뺐다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만약 그때 직접 거액 개런티를 제의받았더라면 정말 고비 감독을 따라갔겠냐고 물었더니 “아쉬움은 남겠지만 당시만 해도 한창 운동이 잘되고 있던 때라 선수 생활을 포기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지금 그런 제의를 받는다면 조금은 달라지겠죠. 정말 관심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일(영화인)은 신기루 같은 거 아닌가요?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고. 사실 제가 그렇게 예쁜 얼굴은 아니잖아요. 운동선수치고, 그것도 태권도선수치고 조금 괜찮게 생긴 정도 아닌가요? 얼굴 잘생긴 사람들이 즐비한 곳에서 감히 명함이나 내밀 수 있겠어요?”
목소리만 들으면 도무지 운동선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여리디 여린 이미지다. 그런 그가 어떤 까닭으로 72kg급 이상의 ‘무시무시한’ 헤비급을 택하게 됐을까. 숨겨진 사연은 이랬다. 그동안 웰터급, 미들급 등 다양한 체급을 경험했지만 헤비급만큼 자신의 신체적인 조건과 잘 맞아떨어지는 체급이 없었다는 것.
“1백미터를 20초에 주파할 만큼 평발이에요. 그러다보니 순발력도 없고요. 감독님이 운동장을 10바퀴 돌라고 하면 7바퀴는 제 힘으로, 나머지 3바퀴는 코치님이 앞에서 제 멱살 잡고 뛰어야만 가까스로 10바퀴를 채울 수가 있어요.
태권도는 순발력과 탄력, 스피드, 힘 등을 골고루 갖춰야 하는데 전 순발력도, 힘도, 스피드도 안되는 거죠. 그런데 헤비급 선수들은 이런 부분에서 약한 면모를 보이거든요. 체중이 실리다보니까 빠르기와는 거리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헤비급을 선택했는데 장난 아니게 힘들어요.”
김순기의 평균 체중은 68kg이라고 한다. 시합을 앞두고 계체량을 할 때 1.5ℓ짜리 물 2통은 마시고 들어가야 가까스로 72kg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외국 선수들은 72kg을 오버하는 선수가 대부분이다. 헤비급이 72kg이상이다보니 80kg이나 90kg을 만나도 ‘끽’ 소리 못하고 상대를 해야 하는 것. 힘에서 달린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김순기가 메달 획득 당시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일명 ‘효자 종목’이라고 불리는 태권도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에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즉 금메달 따면 당연한 일이고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목에 걸면 ‘망한 장사’라고 보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는 것.
“메달 딸 때만 ‘효자 종목’이잖아요. 국제대회에서 금메달 땄다고 해서 엄청난 대우를 받거나 하는 게 없는데도 유독 태권도만 메달의 가치에 대해 저평가를 받는 것 같아요. 사실 종주국이긴 해도 덩치 좋은 외국 선수들을 상대하기란 버거울 때가 많거든요. 진짜 ‘효자 종목’을 만들려면 반짝 관심이 아닌 지속적인 응원과 지원이 필요한데도 말이죠.”
일반인은 고사하고 ‘선수’들만 모였다는 유니버시아드 선수촌에서도 김순기를 태권도선수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대부분 농구선수나 배구선수라고 찍는 게 다반사였다는 것. ‘결승전을 앞두고 너무 긴장된 나머지 잠이 안 와 맥주를 사다 마셨다’는 금메달에 얽힌 뒷이야기를 전하던 그는 학교 선후배 사이로 만나 결혼까지 약속한 남자친구에 대한 고백도 했다.
현역 장교로 근무중인 ‘애인’ 김두현씨에 대해 그는 “그 친구에 대해 꼭 써주세요. 제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요즘 제가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걸 보면서 조금씩 불안해지나봐요”라고 애교스럽게 설명을 덧붙인다. 남자 팬들이 실망할 것 같다고 말하자 “팬은 팬이고 애인은 애인이죠”라고 똑부러지게 말하는 모습에선 ‘소주 낭자’가 ‘태권 낭자’로 다시 돌아온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