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토크’를 위해 과감히 오픈 하우스를 결정한 그의 집 식탁 위에는 부부의 결혼기념일(11월24일)을 축하한다는 내용의 카드와 예쁜 장미꽃바구니가 밝은 조명을 받으며 빛을 내고 있었다. 보낸 사람을 찾아보니 광주 기아의 정재공 단장이었다. 만약 그 꽃바구니를 보지 못했더라면 여전히 삼성 선수라고 착각할 만큼 그의 집은 이승엽, 양준혁 등과 함께 찍은 모습 등 푸른 유니폼의 사진들이 넘쳐났다.
원소속팀 삼성과의 FA 계약에 실패하고 하룻동안 ‘실업자’로 지내다가 그 다음날(11월24일) 28억원, ‘대박의 꿈’을 달성한 마해영(33)은 자신의 계획대로 FA 계약에 성공했다는 안도감에다 남고 싶었던 삼성을 떠나는 아쉬움과 섭섭함, 그리고 광주라는 낯설고 물 선 새로운 둥지에 대한 기대감을 2시간여에 걸친 술자리에서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말수 적고 술 안 마시기로 소문난 마해영이 ‘취중토크’에서 보여준 ‘솔직함의 향연’을 가까이에서 느껴보자.
처음엔 집에서 ‘취중토크’를 하자는 마해영의 제안에 조금은 당황했던 것이 사실이다. 집이라는 공간이 편안하기는 하지만 가뜩이나 재미없다는 마해영의 색다른 모습을 보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1월26일 대구 마해영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미리 맥주와 안주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준비성에 반하기보다는 그의 표현대로 ‘짱구’를 굴리지 않는 솔직한 면면에 푹 빠지고 말았다.
마해영은 우선협상 시한(23일)을 하루 앞두고 삼성의 김재하 단장과 2차 협상을 할 때까지만 해도 ‘절대로’ 삼성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삼성이 1차 협상에서 제시한 액수(3년간 계약금 8억원, 연봉 4억원에 플러스마이너스 옵션 1억원)에서 전혀 양보할 뜻이 없음을 전해 듣고 김 단장에게 FA시장에 나가겠다는 최종 결심을 내비쳤다고 한다.
“자존심이 상했던 거죠. 구단에서 정말 필요로 하는 선수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잡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삼성의 반응이 너무 뜨뜻미지근했던 거예요. 삼성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다음날(23일) 가족들과 곧장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어요. 그러면서도 계속 휴대폰에 신경을 썼어요.
혹시나 다른 구단에서 전화가 올까 싶어서였죠. 그런데 전화가 한 통도 안 오더라고요. 정말 불안했어요. 이러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 그런데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11시쯤 홈페이지에서 팬들과 ‘정팅’(정기적인 채팅)중이었는데 갑자기 기아의 김경훈 스카우트 부장이 예고도 없이 찾아온 거예요.”
▲ 마해영 가족 모습 임준선기자 kjlim@ilyo.co.kr | ||
마해영은 김 부장과 새벽까지 맥주를 마시며 입단 내용에 대해 구체적인 의사를 표현한 뒤 집으로 돌아와 잠깐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날 점심 무렵 일본에서 급거 귀국한 기아의 정재공 단장을 만나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며 기아행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다.
“만약 삼성이 안된다면 정말 친정팀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롯데에서 불러주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거든요. 삼성에서 이승엽을 보며 가장 부러웠던 게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꼬리표였어요. 삼성과 협상을 벌이면서 ‘순서’에서 밀렸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승엽이의 거취 문제가 제 진로를 좌우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죠.
저도 승엽이처럼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고 싶었는데 롯데를 떠나면서 그 꿈이 깨져 버렸어요. 그래서 그 꿈을 살리고 싶어 롯데의 콜을 기다렸는데 정말 뜻대로 되지 않았네요.”
이런 마해영으로선 기아와 계약한 다음날 터진 ‘정수근의 40억 롯데행’이 더욱더 씁쓸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때 그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후배들이 좋은 대우를 받고 롯데로 간다는 것 자체는 정말 축하할 일이에요. 사실 프로야구가 부흥하려면 롯데가 잘해야 하거든요. 최소한 롯데가 4강에 들어가 줘야 프로야구도 발전한다고 생각해요. (정)수근이가 분명 그 몫을 해낼 거라고 믿어요.”
삼성 시절 마해영이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승엽의 그늘’ ‘반쪽선수’ ‘2인자’라는 자신의 실력을 폄훼하는 기사들이었을 것이다.
“저도 삼성에서 1인자가 되기 위해 정말 노력 많이 했어요. 그런데 승엽이를 따라잡기가 힘들더라고요.
롯데에 있을 때만 해도 승엽이의 능력을 조금은 얕잡아봤어요. 삼성으로 가면서 자신 있었죠. 하지만 승엽이는 나보다 한 수 위였어요. 운동선수는 같이 운동을 해보면 그 선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거든요.”
‘1인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마해영의 이야기를 듣는데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인터뷰 내내 ‘자신은 남한테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한다’고 되뇌이던 사람이 이승엽과 관련해서는 순순히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이승엽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모습 또한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마해영은 삼성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으로 자기만의 ‘자리’를 찾지 못한 것을 꼽았다. 올 시즌을 앞두고 2루수에 도전하겠다던 부푼 꿈도 기회조차 주지 않는 현실로 인해 지명타자로만 만족해야 했다. 마해영은 그 부분이 못내 아쉬웠는지 한때 야구계에 떠돌았던 일본 진출설을 처음으로 확인시켜주었다.
“만약 삼성에서 저한테 ‘자리’를 줬더라면 아마 FA 후 일본에 진출했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10월 중순까지 일본의 유명 구단에서 영입 의사를 밝히며 절 보러 직접 한국에 들어왔고 구체적인 몸값도 제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였는데 결국 불확실한 포지션 때문에 실패로 끝나버렸거든요. 만약 올 시즌 2루수로 성공했더라면 저의 장래는 지금과는 또 다른 모양새를 나타냈을 거예요.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요.”
▲ 지난해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끝내기 홈런을 치고 기뻐하는 마해영. | ||
두 아들의 분위기 ‘정화’로 인해 취재 분위기도 솔직·담백에서 위트와 재미 쪽으로 방향을 바꿔나갔다.
마해영이 고려대를 졸업하고 롯데에 입단하면서 받았던 연봉이 1천7백만원. 당시 마해영한테는 1억원이라는 돈이 어떤 느낌이었을까.
“은퇴할 때까지 받을까 말까 한 돈이었죠. 억대 연봉자가 되려면 10년은 야구를 잘해야 하는데 과연 노장한테 그렇게 많은 돈을 줄 만큼 구단에서 이해와 배려를 해줄까 싶었어요. 제가 지금 이렇게 좋은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하긴 28억원을 4년으로 나누면 한 해 받는 돈만 무려 7억원이나 된다. 가난한 어린 시절 야구부에서 밥도 주고 고기도 먹을 수 있다는 유혹에 이끌려 방망이를 잡으며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한눈 팔지 않고 달려온 결과였다. 그 꿈 같은 28억원은.
“무조건 부자가 되고 싶었어요. FA 계약 후 부자가 됐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생활이 안정된 것은 사실이죠. 사실 5년 전만 해도 전 ‘알거지’였어요. 친구한테 보증을 섰다가 친구 일이 잘못 되는 바람에 월급이 차압당하는 등 정말 어려움이 많았거든요.
주머니에 천원짜리 한 장 넣고 다닐 때도 있었고 시즌 끝나면 초등학교 인스트럭터로 아르바이트하며 생활비를 마련한 적도 있었죠. 그때 깨달은 게 있어요.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돈이 없으니까 아무리 부부가 사랑한다고 해도 행복해질 수는 없는 거였어요. 그래도 남편 탓하지 않고 묵묵히 참아준 아내가 너무 고맙고 대견할 따름이죠.”
마해영은 술을 잘 마셨다. 시즌 중에는 체력 보전을 위해 안 마실 뿐이지 한번 마셨다 하면 소주 5병에 생맥주 5백cc 20잔은 너끈하고, 폭탄주는 취해 본 기억이 없다고 할 만큼 주량이 엄청났다. 대학 때는 술값을 충당 못해 술을 못 마셨고 막걸리는 배가 불러서 사양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의 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이 되고도 남았다. 지금 술을 즐겨 하지 않는 이유는 오랫동안 야구를 하고 싶기 때문이란다.
“변변한 연고도 없이 광주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건 분명 모험이자 도전이겠지만 한편으론 기대와 설렘이 절 자꾸 자극시켜요. 기아가 갖고 있는 장점에 저의 장점을 흡수시키고 싶어요. 그러면 구단에서 바라는 대로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요? 마해영한테 4년은 끝이 아닙니다. 40을 넘어서도 타석에 들어서는 ‘실력 있는’ 선수가 되는 게 앞으로 저의 목표가 될 겁니다.”
방에서 만화영화를 보던 둘째 낙현이가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거실로 재등장하면서 분위기는 다시 ‘장터 마당’이 되고 말았다. 11월26일의 마해영은 28억원을 챙긴 FA ‘대어’가 아니라 두 개구쟁이 아들의 아빠이자 키가 170cm인 늘씬한 미녀를 아내로 둔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가장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