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골퍼로서 ‘최고의 한해’를 보낸 박세리는 1승을 더 거둬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뒤에는 ‘자신만의 삶’을 살고 싶어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올 한 해 26개의 LPGA 대회에 참가해 우승 3번에 2위 6번, 톱10에는20번이나 올랐다. 박세리로선 어느 해보다 알찬 수확을 거뒀고 한국인 최초로 시즌 최저타상인 베어트로피를 수상하기도 했지만 올해도 역시 애니카 소렌스탐의 벽을 넘어서기엔 역부족이었다. 4년 넘게 2인자에 머물렀던 데 대한 회한과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독특한 술버릇, 그리고 한희원의 결혼을 지켜보며 세운 결혼관 등을 솔직하게 풀어낸 박세리와의 이야기 한마당을 옮겨본다.
얼마 전에 끝났던 앙드레 김 패션쇼를 화제로 거론하자 박세리는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재작년에 이어 두 번째 행사였는데 여전히 불편하고 어색했다”고 당시의 일을 떠올린다. 지난 15일 이 패션쇼 무대에서 박세리는 서재응과 함께 웨딩 컨셉트의 의상을 소화해냈다.
“화장을 진하게 하면 제가 아닌 것 같아요. 평소 얼굴에 손을 자주 대는 편인데 화장을 하면 조심스러워서 손도 못 대잖아요. 사람들이 자꾸 파트너로 나온 서재응 선수에 대해 물어보는데 솔직히 그분한테는 너무 미안한 얘기지만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잘 몰랐어요. 쇼하는 동안에도 옷 갈아입느라 정신이 없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고요. 유니세프 자선모금을 위한 행사라 참석한 것이지 일반적인 패션쇼였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어서인가. 박세리는 웨딩드레스에 대해 별다른 감흥이 없다고 한다. 남자친구가 있어야 웨딩드레스를 보고 설레는 감정이 들텐데 그런 상황이 아니다보니 마치 남의 옷을 입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패션쇼를 입에 올린 김에 잠시 치마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다. 치마가 몇 벌 정도 있냐고 묻자 거의 없다고 한다.
“최근에 큰맘 먹고 진 소재의 긴 치마를 샀는데 언제 입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한)희원이 결혼식 때 청으로 된 옷을 입어도 되나요? (가능하면 안 입는 게 좋다는 기자의 조언에) 치마는 그거뿐인데 큰일 났네.”
치마 자체도 부담스럽지만 결혼식에 치마 입고 나타났다가 원치 않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것도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목하 고민중이라고 한다.
어느덧 20대 중반을 넘어 우리 나이로 28세를 눈앞에 두고 있다. 갑자기 나이를 거론하고 보니 박세리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게 된다. 박세리는 LPGA에서 활동하는 한국선수들 중 강수연 다음으로 ‘최고참’이다.
한국선수들끼리의 모임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은 박세리가 도맡아 한다. 나이와 경력과 후배들을 아우르는 카리스마에선 박세리를 따라올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박세리는 앞에 놓인 와인 잔을 입에 갖다대며 “미국에서 식사할 때 와인을 즐겨 마신다. 이야기 나누며 마시는 술로는 와인이 제일 좋은 것 같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기사 타이틀에 걸맞게 술에 관한 에피소드를 물어봐야 했다. 골프계에서는 박세리가 제법 술이 센 편이라고 소문이 난 상태라 직접 확인할 겸 술 이야기를 꺼냈다.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에요. 나쁜 버릇이 있다면 술잔이 비어 있거나 술이 떨어지는 걸 참지 못해요. 빈 잔은 무조건 채워야 하고 잔이 채워지면 또 무조건 마셔야 해요. 술이 떨어질 것 같으면 그 전에 미리 시켜놔야 하고요. 그러다 보니 좀 세게 마시면 비몽사몽이 되죠. 아무리 그래도 중간에 도망가는 치사한 짓은 안 해요. 끝까지 버텨요.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가서 탈이지만.”
박세리의 표현에 의하면 술을 마실수록 화장실 출입이 잦아지다가 술이 취했다 싶으면 화장실에서 나오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다른 사람한테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화장실에 앉아 있다가 잠이 들거나 ‘기절’하는 상황에 빠져드는데 문을 잠그는 바람에 친구들이 1시간 넘게 화장실 문을 두들기며 자신을 깨우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룸에서 술을 마신다고 해도 가끔 바깥 출입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럴 때 다른 사람들한테 제가 취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가 않아요. 경호원들이 따라다니지만 절대로 절 부축하거나 손을 대지 못하게 해요. 창피해서 그래요. 문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다 해도 제 발로 걸어가자는 주의거든요. 문 밖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술은 종류별로 마셔본 모양이다. 양주, 맥주, 프리미엄(?) 소주들의 다양한 이름에다 산사춘, 복분자, 그리고 서편제까지 술 이름이 계속 이어진다. 예전에는 소주를 조금 마셨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쓰디 쓴 소주보다는 달짝지근한 과실주가 더 입에 맞는 것 같다며 다시 와인 잔을 들었다.
박세리는 한희원과 죽이 잘 맞는다. 박세리 말로는 성격이 비슷해서라고 한다. 그런 후배가 어느날 갑자기 결혼한다고 하니 박세리로선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 지난 11월26일 귀국 당시의 박세리와 한희원. | ||
어떤 남자를 원하는지 물어봤다. 너무 식상한 질문이었지만 박세리는 의외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정말 평범한 사람을 원해요. 저도 여자로선 평범하기 때문이에요. 앞으로 남자도 좀 만나고 데이트도 해야 하는데 아빠가 워낙 반대를 심하게 하시니까 엄두도 못내고 있어요.”
박세리의 말이 끝나자 마자 아버지 박준철씨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딸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가 이만큼 했기 때문에 오늘의 박세리가 있는 것”이라고 항변(?)을 한다. 그러자 박세리의 반격이 만만치 않다.
“아빠한테 정말 서운해요. 그동안 남자를 사귀게 놔뒀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거예요. 아는 오빠들한테 물어봐요. 박세리와 사귀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대답이 똑같아요. 부·담·스·럽·다는 거예요. 아빠는 제가 얼마나 외로워하는지 잘 모를 거예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박세리는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도 크지만 ‘머리’가 커진 딸을 여전히 품안에만 두려하고 간섭하는 아버지가 때로는 ‘원망’스러운 듯했다. 박세리는 앞으로 1승을 더 거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뒤에는 당분간 골프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돌보는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명예의 전당’이란 목표를 이룬 뒤엔 또 다른 목표가 있는 법이라며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친구들로부터 ‘파파 걸’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가장 싫다는 박세리는 이번 귀국만큼은 마음 편히 쉬며 놀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막강한’ 규제 앞에선 ‘골프 여왕’도 기를 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세리는 23일로 예정돼 있는 KBS-2TV <쟁반 노래방>의 출연을 앞두고 잔뜩 기대를 부풀리고 있었다. 어머니 김정숙씨와 막내 동생 애리씨가 열성 팬임을 자처하는 유재석이 MC로 나오기 때문이다.
“애리 친구는 지금 우리 집에서 합숙중이에요. 녹화하는 날 따라가서 유재석씨를 직접 보겠다고요. 유재석씨가 방송을 통해 절 이상형이라고 했다는데 직접 만나면 웃음밖에 안 나올 것 같아 큰일 났어요.”
박세리는 유재석보다 공동 MC인 김제동한테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인터넷 고스톱 게임에 김제동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코너가 있는데 그 목소리를 듣고 반했다는 것.
골프 이야기보다는 골프 외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박세리의 고민과 생각들을 보다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와인 두 잔에 자신의 소탈한 성격을 드러내는 박세리한테선 ‘골프 여왕’의 이미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올 한 해 상금과 스폰서 비용을 합해 총 60여억원을 벌어들인 부자였지만 기자가 만난 ‘현재’의 박세리는 ‘남자친구 급구’ 상태였고, 사랑하는 아버지한테 약간의 자유를 허락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효녀였다. 찜질방에서 만난 팬들의 사인 요청에 다소 ‘민망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거절하는 법 없고 노래방에선 ‘남행열차’와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라는 노래를 18번으로 달고 사는 보통 여자, 박세리. 그런 귀엽고 따뜻함이 가득 묻어나는 여자를 편하게 해줄 남자는 어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