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28일 김영선 한나라당 의원(왼쪽)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인사하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오른쪽).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대권 재수(再修)에 나섰던 2002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정계은퇴 선언과 함께 정국 현안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을 자제해 왔던 이 전 총재가 최근 정치권 행사에 부쩍 자주 얼굴을 내미는가 하면 공개연설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직설적으로 밝히는 등 과거와는 완연히 달라진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이 전 총재의 팬클럽인 ‘창사랑’은 그의 대권 삼수(三修)를 강력 요구하고 나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전 총재의 ‘롤백’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2월 23일 부산 방문을 전후한 일련의 발언을 계기로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 전 총재는 이날 부산 롯데호텔에서 열린 권철현 의원의 출판기념회 축사를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한나라당을 싸잡아 강도 높게 비판해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전 총재는 “DJ는 햇볕정책으로 북한의 체제를 녹일 수 있다고 장담하다가 북한이 핵무기로 무장하는 결과를 가져온 장본인이다. 그런 분이 왜 또 평양에 가려고 하는가. 항간에는 DJ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6·15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추진하기 위해 가는 것 아니냐는 의심과 걱정의 목소리가 높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북한 방문 보다 과중한 세금정책, 빈부격차로 고생하는 국민을 먼저 걱정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대목까지는 대북 문제에 대한 이 전 총재의 평소 입장을 고려할 때 ‘있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 실제 이 전 총재는 정계은퇴 후 3년 만의 첫 공개연설인 1월 25일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출판기념회 축사에서 DJ정부의 햇볕정책과 관련해 “북이 핵무기를 개발했고 햇볕정책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북한의 개혁개방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패다. 금강산 관광사업이나 개성공단 건설, 경원선 철로 연결 등은 남측의 투자내용일 뿐 북한체제의 개혁개방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 나라는 북한의 자유와 민주화를 주장하거나 무원칙한 햇볕론을 비판하면 반(反)통일세력이니 수구세력이니 하는 말을 듣게끔 돼버렸는데 이렇게 몰아붙이는 자들이 오히려 반통일세력이고 수구세력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날 이 전 총재의 칼날은 DJ와 햇볕정책에 머물지 않고 한나라당 대응의 문제점에까지 이어졌다. 이 전 총재는 “(한나라당이) DJ 방북 추진의 본질은 제쳐 두고 ‘지방선거에 불리하다’는 식으로 당장의 유·불리만을 따지는 것은 멀리 보지 못하는 것이다”고 운을 뗀 후 작심한 듯 비판을 이어갔다.
▲ 2002년 대선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눈물을 흘리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 ||
2002년 대선 당시 자신의 비서실장이었던 권 의원에 대한 ‘덕담’ 수준에 머물 것으로 예상했던 이 전 총재의 축사가 이처럼 한나라당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으로 이어지자 행사장은 일순간 술렁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내빈석에서 이 전 총재의 연설을 듣고 있던 이명박 서울시장(MB), 손학규 경기지사 등은 얼굴에 놀라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고 동석한 한 초선 의원이 밝혔다.
이 의원은 “나뿐 아니라 당 소속 의원들 대부분이 이 전 총재의 한나라당 비판 발언에 눈이 휘둥그레져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이전에도 ‘이 전 총재가 결국 정계로 돌아오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긴 했지만 ‘실제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란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그날 이 전 총재의 언행은 현역 정치인과 전혀 다를 바 없었으며 그의 위상에 비춰 앞으로 당내 역학구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을 낳기에 충분했다”고 말했다.
실제 이 전 총재는 권 의원 출판기념회에 앞서 일부 기자들과 만난 자리와 행사 후 서울로 올라와 강재섭 의원과 양정규 정창화 김기배 전 의원 등 가까운 한나라당 인사들과의 만찬에서 정계복귀를 예고하는 듯한 얘기를 쏟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고위 공직을 여러 곳 거치고 대통령 후보를 두 번이나 했으니 나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어려운 현실을 도피해 방관자로 지내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본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비록 “현실정치에 뛰어들지 않더라도…”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당내에서는 이 전 총재의 이 같은 발언을 사실상의 정치재개 선언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정계복귀설’에 대해 그동안 “뜬금없는 얘기”라며 일축했던 전·현 측근들의 반응에도 점차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지난 대선 당시 이 전 총재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한 의원은 “이 전 총재의 마음에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직접적인 정치참여일지 아니면 한나라당에 나름대로의 구상을 전달하는 ‘훈수정치’에 머물지는 알 수 없지만 넓은 의미에서 정치활동을 재개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역시 이 전 총재의 핵심측근이었던 한 의원도 “나는 (복귀) 가능성을 낮게 봤지만 연초 이 전 총재가 서빙고동 자택을 개방한 이후 상황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며 “5월엔 지방선거가 예정되어 있고 7월엔 전당대회도 있는 만큼 이 전 총재가 뭔가 ‘역할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선을 노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측근들의 전망과 달리 외곽 그룹에선 2007년 대선 출마를 전제로 이 전 총재의 정계복귀를 추진하는 움직임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특히 대표적인 이 전 총재 지지그룹인 ‘창사랑’은 ‘이회창 대망론’을 공개적으로 설파하고 나선 상황이다.
조춘호 창사랑 대표는 최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고건 전 총리가 범여권 연합의 후보로 나설 경우를 전제로 “야권에서 승리할 수 있는 후보는 이 전 총재뿐”이라고 주장했다. 조 대표는 “현재 고 전 총리가 차기 대권후보에 대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현 정권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국민들의 반사적 기대현상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 총재는 국정경험과 국민들을 정서적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큰 저력을 가지고 있다. 다음 대선에서 만약 고 전 총리와 이 전 총재 간에 선거가 치러진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또 ‘빅 3’(박 대표-MB-손 지사) 등 당내 대선 후보군들에 대해서 “훌륭한 정치 지도자들이지만 2% 부족하고 뭔가 답답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 이들에 대한 후보 검증과정에서 이 전 총재가 경험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전 총재가 모든 검증과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국민후보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전 총재 주변의 이 같은 ‘희망 섞인’ 전망에 대해 당내에선 냉담한 반응이 대부분이다. 계파를 떠나 이 전 총재가 당의 원로로서 외곽에서 ‘어드바이스’하는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곤란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한 핵심 당직자는 “뒤에서 당의 어른으로서 지원하는 모습은 힘이 되지만 스스로 (대선) 후보가 되려 하는 것은 당에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고 말했고 과거 측근으로 분류되던 한 재선 의원도 “이 전 총재가 전면에 나서는 것은 당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가세했다.
소장파들의 반대는 더욱 거세다. ‘수요모임’의 한 의원은 “정치를 하고 안하고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이 전 총재 시절의 ‘멍에’ 때문에 당이 쫄딱 망할 뻔하다 겨우 살아나려는 판에 (이 전 총재가) 정계복귀를 한다면 나부터 가만있지 않을 것이며 아마 당이 쪼개질 것”이라며 “대권 후보 등 당내 지도자들도 당장 (이 전 총재가) 도움이 된다고 매달릴 것이 아니라 명분과 원칙을 갖고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영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