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권 일각에서는 고건 전 총리의 행보를 놓고 “돌다리만 너무 두드리다 돌이 깨지겠다”고 일침을 놓기도 한다. 사진은 총리 시절 청와대 안의 전직 대통령 사진 앞에서. | ||
고건 전 총리가 정계복귀와 대권 도전 질문에 대해 내놓는 ‘모범답안’이다. 그로서는 날마다 이런 질문에 매번 똑같이 대답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닐 것이다. 묻는 기자들도 ‘이번만은…’이라는 기대 속에 대답을 들어보지만 언제나 준비된 답안이 되돌아온다. 혹 그가 모범답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대답을 했을 때면 기자들은 ‘고건 대권 도전 선언’이라는 제목을 붙여 부산을 떨어보지만, “아직 아니다”라는 그의 부인에 그 호들갑도 금세 잦아든다.
이런 언론과 고 전 총리 간의 대권 도전 선언 ‘숨바꼭질’ 속에 짜증을 내는 국민들도 있다. 이제는 삼척동자도 그가 대권 도전에 강한 뜻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도 이제는 아예 드러내놓고 여야 정치인들을 만나며 대권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정작 공식 선언은 하지 않고 있다. 도대체 그는 왜 끝까지 낚싯줄을 드리우지 않고 바다만 바라보는 것일까. 고건의 ‘거북이 행보’ 그 이면을 따라가 봤다.
“그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안 건너는 사람이다.”
고건 전 총리의 대권 도전 행보에 관한 우스갯소리다. 그는 지난해부터 1년이 넘게 각종 대권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1, 2위를 차지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대권 도전 의사를 묻는 질문에는 늘 준비된 대답만을 되풀이한다. 고 전 총리는 가장 최근인 지난 2월 24일 대권도전 질문에 대해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현 시점에서 해야 할 역할에 대한 구상을 가다듬고 있으며 때가 늦지 않게 결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그의 공식적인 정치활동 선언이 임박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먼저 고건 전 총리는 현 시점에서 똑 부러지게 자신의 진로를 밝히지 않는 속사정이 있다.
첫 번째는 그가 현실 정치와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끊임없는 몸값 올리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고 전 총리의 경기고 후배인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고 전 총리가 섣불리 당을 만들거나 이념을 표방하든지, 또는 지역을 대표한다며 정치권에 나서는 순간 지금까지의 지지율에서 거품이 싹 빠질 것이다. 지금은 여야의 러브콜을 받으며 주가를 한껏 끌어올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내에서도 중진 L의원 등 관료 출신 의원들과 자주 모임을 가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문까지 닫아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의원은 또한 “고 전 총리를 자주 만나는데 그때마다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조언을 해준다. 지방선거 이후에 어차피 정치권의 변화가 불가피하니 그때까지 보수 색채만 내고 있으라고 말했다. 어설픈 진보 색채 띄우기는 오히려 독이 된다. 여당이 지방선거에 대패한 뒤 정동영 의장 책임론 등이 불거져 정계개편의 단초가 마련되면 중도우파가 자연스럽게 그의 품으로 올 수도 있다. 그때 신당 창당이든 열린우리당이든 자신의 깃발 아래 모이라고 하면 된다”고 말했다.
고 전 총리가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데 아직은 그 때가 아니라는 관측도 있다. 고 전 총리는 최근 자신의 정치 행보와 관련해 “이념과 정파를 초월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치가 필요하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는 고 전 총리 입장에서 보면 앞서의 의원이 밝힌 것처럼 열린우리당 중도우파 진영과 한나라당 민주당 일부 세력이 고 전 총리의 깃발 아래 ‘순순히’ 모이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열린우리당은 지방선거 패배를 전제로 정동영 의장 책임론이 불거지며 분당론까지 가는 정치적 변곡점이 생겨야 새로운 대안인 고건 전 총리의 깃발 아래 모일 수 있다. 한나라당도 7월 전당대회가 중요하다.
차기 대선을 준비해야 하는 막강한 관리형 대표가 선출되는 과정에서 대권주자들 간의 충돌로 분당까지 가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이 경우 한나라당의 일부 이탈 세력이 고 전 총리 깃발로 모일 수 있다. 민주당도 한화갑 대표가 사법 처리돼 당권을 잃게 되면 김경재 전 의원 등이 고 전 총리 앞으로 두 손 들고 ‘투항’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정치권의 전반적 격변이 임계점에 다다른 상황에서 고 전 총리가 드라마틱하게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고 전 총리는 여야 정치권이 모두 요동치는 임계점을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이 형성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임계점은 여야의 정략적 판단과 정권 창출에 따른 편의적인 합종연횡이 될 가능성이 높을 뿐 이념과 정파를 초월하는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란 것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고 전 총리 중심의 정계개편에 회의적인 당내의 일부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고 전 총리의 ‘거북이 행보’ 그 세 번째 이유는 아직 자신의 모든 것을 걸 만한 뚜렷한 정치세력이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지방선거 전 그의 영입을 추진하는 것이나, 김근태 최고위원이 전당대회 전 화끈한 ‘러브콜’을 보낸 것이나,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오랫동안 그에게 ‘연애편지’를 보낸 것이나, 박근혜 대표가 “고건 전 총리는 한나라당과 어울리는 분으로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공개 구혼’을 하는 것 등은 모두 고 전 총리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고민중이다”라는 말로 상대의 애를 태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주판알을 튕긴 끝에 한쪽의 손을 덥석 잡았다가 덜컥 실패할 경우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고 전 총리는 건곤일척의 단 한 번 승부수로 대권 후보의 기회를 쟁취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화산이 터지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최대한 모호한 태도를 취한 뒤 마지막 실리를 잡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변수가 생기고 있다. 바로 지방선거 때문이다. 현재 고건 진영에서는 지방선거 이후로 선택을 미루자는 ‘신중파’와 지방선거에서 영향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동안의 높은 지지율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칠 것이라는 ‘참여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일부 언론에서 보도한 ‘새시대정치연합’ 구상도 참여파의 세력이 커지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고 전 총리가 새시대정치연합을 구성한 뒤 열린우리당, 민주당, 국민중심당을 아우르는 선거연합을 추진할 것이라는 게 그 구상의 핵심이다.
고 전 총리의 한 측근은 “고 전 총리의 오랜 친구인 서울대 J교수가 주축이 된 이른바 ‘동숭동 친구들’이 고 전 총리의 느린 행보를 보다 못해 새시대정치연합 얘기를 언론에 한번 흘려 지방선거 참여에 대한 여론을 떠보려고 했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고 전 총리는 새시대정치연합 구상을 즉각 부인했기 때문에 지방선거 참여 문제도 다시 물밑으로 들어가 버린 것으로 해석된다.
고 전 총리는 요즘 지방선거 참여 여부를 두고 여전히 장고를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자칫 이번 기회를 통해 세불리기를 하지 못하면 향후 정계개편에서 ‘종속변수’로 전락할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섣불리 선거에 개입했다가 선거 결과에 따라 상처만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몸값’이 더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게 가장 최근의 심경인 것 같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고 전 총리가 돌다리만 너무 두드리다가 돌이 깨지는 수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물을 한 번 건너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과연 고건 전 총리는 언제쯤 ‘고’를 외칠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