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해찬 총리의 ‘부적절한 골프 파문’으로 예상보다 빨리 여권의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왼쪽부터 이해찬 총리, 노무현 대통령, 정동영 의장. 청와대사진기자단 | ||
먼저 이 총리 골프 사태의 본질은 노무현 대통령의 레임덕 방지라는 대통령 중심 정치와 정동영 의장을 중심으로 차기 대권을 창출해야 하는 대권정치의 충돌 지점을 정면으로 관통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열린우리당 내의 정 의장 계보와 이 총리를 지지하는 김근태 최고위원 계보의 충돌이라는 국지전적인 요소도 자리 잡고 있다. 정 의장으로서는 이 총리 문제로 자칫 민심이 더 악화, 지방선거에서 힘 한번 못 써보고 앉아서 죽게 될 수 있다는 절박감마저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총리를 정국 운영의 분신으로, 나아가 여차하면 제3의 여당 대권주자로 생각해 온 것으로 알려진 노 대통령의 정국 운영도 큰 차질이 예상된다. 3·1절 골프의 여파는 향후 여권의 권력 구도에도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마침내 여권에 불이 붙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 간의 한판 승부다. 양측의 갈등은 이미 예견돼 있었다. 5·31 지방선거 성적에 따라 무게중심이 어디로든지 기울어질 형국이었다. 그런데 이해찬 국무총리의 3·1절 골프 파문이라는 돌발 변수가 튀어나오면서 양측의 대결도 조금 빨라지게 된 것뿐인지도 모른다.
레임덕 방지를 위해 대통령 중심의 정치를 펼쳐야 하는 노 대통령의 ‘방패’와 차기 대권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노 대통령을 밟고 가야 하는 정 의장의 ‘창’이 마침내 숙명의 한판 대결을 펼치는 것이다. 문제는 청와대가 예상하고 있던 총리 교체 등의 정계개편 수순이 지방선거 이후에 맞춰져 있었는데 이번 이 총리 골프 파문으로 그 시기가 앞당겨지면서 예측 가능한 변수들이 줄어들어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창’을 든 정동영 의장 입장에서 ‘전쟁’의 양상을 살펴보자. 정 의장은 이번 이 총리 사태를 매개로 지방선거 승리의 기반을 잡는 동시에 당·청 관계에서도 우위를 점하려고 하고 있다. 그 대전제가 바로 이 총리의 퇴진이다. 정 의장 측에서는 이 총리를 업고 지방선거를 치를 경우 “싸움은 해보나마나 뻔한 결과일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정 의장 측의 한 의원은 이미 “이 총리가 유임되면 유시민 장관 임명 때만큼 당청 관계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또 다른 의원은 ‘이 총리 골프 파문’에 대한 민심을 전하면서 처음부터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골프를 레저스포츠로만 보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지역구에서 이 총리 얘기만 나와도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더구나 내기골프까지 했다는 것이 드러난 이상 그의 사퇴는 불가피해 보인다”고 선을 확실히 그었다.
또한 사건 초기에는 수도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이 총리가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지만 내기골프 확인과 청와대 전격 조사 등이 이어지면서 사퇴론은 급격히 당내 전반으로 확산, 더 이상 당 지도부로서도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가는 형국이다. 앞서 당 지도부가 이 문제와 관련 당 소속 의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을 때도 상당수 여당 의원들은 “곤혹스럽고 답답하다” “말 안 해도 알지 않느냐”면서 입을 다물었지만 내기 골프 사실이 전해 진 뒤로는 사퇴론이 급물살을 탔다.
그런데 정 의장의 현실적 고민은 이 총리를 자신의 의도대로 ‘시원하게’ ‘조속히’ 사퇴시킬 수 없다는 데 숨어 있다. 정 의장으로서는 이 총리 유임시 지방선거의 고전이 예상되지만 그렇다고 청와대와 총리실의 유임 기류를 정면으로 거스르면서 이 총리의 사임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것도 부담이기 때문이다. 여당 의장이 총리의 해임을 앞장서서 요구했다가 자칫 여권의 분열을 자초했다는 비판만 받은 채 이 총리가 그대로 살아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정 의장은 지방선거 승리와 당·청 관계 우위 확보를 위해서도 이 총리 퇴진이라는 전리품을 획득해야 했지만 아직 당의장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되는 정 의장이 살아 있는 권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만큼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고 실패할 경우 그 역풍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그로서는 난감한 처지였던 것이다.
물론 열린우리당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은 그렇지 않아도 지방선거 전후로 총리 교체 카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총리 퇴진이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앞으로는 여권의 모든 역량이 차기 정권 창출 쪽으로 모아지기 때문에 자연스레 주도권은 당으로 갈 것으로 보인다”는 관측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전망은 권력의 속성을 간과하고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노 대통령의 정치력이나 이 총리에 대한 노 대통령의 신임, 기대를 너무 과소평가한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그럼 이번에는 노 대통령의 ‘수성’ 입장에서 ‘이해찬 사태’를 바라보자. 먼저 노 대통령의 정치 로드맵으로는 지방선거 이후 개헌론 등이 불거지면서 정계개편이 불가피하게 될 때 이 총리를 포함해 전면적인 관리형 개각을 검토해볼 것이라는 게 유력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당장 지방선거에서 죽을 쑬 것이 뻔한 여당으로선 ‘당장 이 총리를 자르라’고 요구해 왔다.
먼저 여당의 요구대로 ‘순순히’ 이 총리를 퇴진시키는 경우. 이는 노 대통령의 ‘주도권 우선 선점’이라는 정치 스타일상 그가 그리 좋아하는 방법이 아니다. 한 재선 의원은 “이 총리가 야당과 언론의 공세에 밀려 물러날 경우 대통령이든 여당이든 정국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야당은 새 총리의 청문회로 지방선거 정국에서 또 다른 이슈를 만들 가능성도 있어 계속 야당에 정국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도 이에 대해 “노 대통령에게 이 총리는 입술과 같은 존재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노 대통령이 이 시점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레임덕이다. ‘총리가 사퇴할 경우 정책에 관한 국가의 틀이 흔들리게 된다’는 청와대 측 발언은 비록 참모의 입을 빌렸지만 노 대통령이 느끼고 있는 치명적 레임덕에 대한 두려움과 처량함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해찬 총리 없는 분권형 대통령제(또는 책임총리제)는 상상이 안 되는 것이다. 이 총리만큼 자신과 코드가 일치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며 이 총리의 퇴진이 어려울 것으로 내다본 바 있다.
하지만 이 총리 골프 문제가 이미 넘지 말아야 할 산을 넘었기 때문에 노 대통령이 ‘읍참마속’의 심정이 될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상당수의 분석이다. 내기 골프 사실이 전해지자 먼저 청와대 민정실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전면적 조사를 시작했고 검찰도 독립적으로 이미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이는 이 총리 사건이 청와대의 애초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일 수 있다는 방증으로도 볼 수 있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일단 민정수석실 산하 민정비서실과 공직기관비서실 등이 이번 사건 조사를 맡을 예정이다. 그런데 사건 경중 여부에 따라 사정비서관실에도 ‘스탠바이’를 요청해둔 상태라고 들었다. 만약 법 처리에 엄격한 사정비서관실이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하게 되면 이 총리 파문은 일파만파의 사건으로 커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일단은 1차 조사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아직 전면적인 수사 단계는 아니지만 사안에 따라 조사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청와대 조사 결과 이 총리 처신에 심각한 문제가 발견될 경우 전격 경질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청와대 인사들 가운데서도 이병완 비서실장은 끝까지 “국정운영에서 여론은 중요한 요소다. 만사를 여론이라는 일시적인 ‘국민정서법’에 휘말려 사실관계나 법 절차를 무시한다면 책임 있는 국정 운영방식이 아니다”며 청와대 민정실의 조사결과를 일단 지켜보겠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나 복수의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이 총리가 만난 사람 중에서 영남제분 유원기 회장 같은 이는 지역에서 안 좋은 소문도 있어 이번 사건이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면서 “여러 의혹 중 일부는 게이트 수준으로까지 확대될 만큼 문제가 심각한 사안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3·1절 골프 불똥이 엄청난 휘발성을 지닐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정동영 의장만큼이나 이 총리 문제로 딜레마에 빠져 있다. 그가 이 총리 사태 이후 정국에서 당과 대립할 경우 여권 내부의 분화를 촉발시키는 동시에 야당의 공격도 거세질 것이 분명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게 뻔하다. 그렇다고 당에 주도권을 내준 듯한 모습을 보인다면 안정적 국정운영이 틀어지는 동시에 충성도가 높은 데다 실세인 이 총리만 한 후임자를 찾지 못한다면 곧바로 노 대통령의 레임덕으로 이어진다는 우려도 강하다. 골프 파문 직후 노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들이 ‘여기서 밀리면 정권이 끝장날 수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는 얘기가 정가에 흘러나온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이해찬 골프 정국에 대한 여권의 딜레마는 노무현-정동영 대결 구도 외에 당내 실용파와 재야파의 대결로도 관심을 모은다. 정 의장을 주축으로 하는 실용파는 앞서 살펴본 대로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이 총리 퇴진이 불가피하다고 보았지만 ‘범재야파’로 분류되는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해찬 구하기’에 나섰던 상태고 김근태 계의 맏형격인 장영달 의원도 “일관된 국정운영을 위해 총리를 바꿀 때가 아니다”라며 정 의장 세력을 견제해 왔다.
여기에는 지방선거 성적표를 바라보는 양측의 미묘한 시각 차이도 반영돼 있을 수 있다. ‘포스트 정동영’을 노리고 있는 김근태 최고위원 측으로서는 정 의장이 이 총리가 유임된 상태에서 지방선거에서 대패할 경우 다시 한번 더 여당의 ‘적자’ 자리를 노려볼 수 있다는 계산을 할 수도 있다. 반면 이 총리가 사퇴하면 여권의 개혁파 몰락을 불러오는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도 이 총리 보호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총리의 내기골프 파문 등이 겹쳐 나오면서 개혁파의 기류에도 적잖은 변화 조짐이 보이기 시작, 김근태계의 계산에도 차질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딜레마로 작용하고 있다.
때 아닌 골프 정국에 여권은 쑥대밭이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 터지더라도 이번과 같은 여권 내부의 권력 투쟁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대통령 중심 정치와 대권주자 중심의 정치 대결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