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7일 5당 원내대표와의 간담회에서 ‘대화정치 복원’을 시사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정 의장이 여당의 확실한 차기주자로 낙점을 받았다면 노 대통령의 ‘양보’가 필연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조짐이 없다. 또한 노 대통령이 이 전 총리를 사퇴시키면서 정 의장에게 지방선거의 책임을 모두 뒤집어씌우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진단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 전 총리의 사퇴는 돌발 변수였기 때문에 노 대통령이 지방선거를 앞둔 당의 입장을 배려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청’에서 ‘당’으로의 권력이동이 시작되었다는 레임덕 조짐을 그냥 방관만 할 것인가. 대답은 역시 ‘아니올시다’로 보는 게 맞다. 노 대통령이 이 전 총리 사퇴 뒤 구상할 수 있는 ‘다음 수’를 장·단기적 관점에서 조망해본다.
지난 3월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5당 원내대표 만찬 간담회에는 ‘참여정부 최초’라는 타이틀이 하나 걸렸다. 이날 만찬에는 열린우리당 김한길, 한나라당 이재오, 민주당 이낙연 원내대표와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단 대표, 국민중심당 정진석 원내대표가 참석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과 여야 원내대표 회동 자리에 한나라당이 참석한 것은 현 정부 들어 처음이었다. 참여정부 최초로 제1야당 원내대표가 여야 회동에 참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날 만찬을 두고 일부에서는 ‘정치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사실 노 대통령은 분권형 총리제의 선봉에 섰던 이 전 총리를 정동영 열린우리당의 요청에 따라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잘라버렸다. 이를 두고 권력의 중심이 서서히 청에서 당으로 이동하고 있다든지 노무현식 역발상 정치가 퇴조하기 시작했다는 등의 해석이 쏟아졌다. 노 대통령이 정치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리는 듯한 시점과도 묘하게 일치하는 시점에서 여야 원내대표 모임이 열리자 그 배경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 또한 노 대통령이 이 모임을 통해 이해찬 총리 사퇴 이후 국정운영 기조를 어떤 방향으로 가져갈지에 대한 구상의 일단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더욱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노 대통령은 이날 모임을 통해 정치권에 두 가지 ‘화두’를 던진 것으로 해석된다. 먼저 참여정부 들어 처음 여야 대표 만찬에 참석한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대화정치 복원’이라는 ‘맛보기’를 통해 대연정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차기 총리에 대한 인사 원칙에 대해서도 조언을 구했다는 점에서 향후 야당과의 ‘폭 넓은’ 협조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분석된다.
노 대통령은 여야 원내대표 초청 배경과 관련해 “앞으로 모든 문제들에 대해 대화의 문화를 만들어갔으면 좋겠고 대표들 간이나 정당들 간에 막히면 대통령이 초청해서 대화를 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는 본격적인 여야 대화정치의 서막을 알리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곧 열린우리당에 대한 일종의 ‘경고’ 메시지로도 읽힌다. 야당과의 협조 가능성을 슬쩍 비쳐 이 전 총리 사퇴로 고양된 분위기를 식히고 여당도 얼마든지 ‘견제’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점을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화두’는 모두 대통령이 여전히 정치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재삼 강조했다는 점에서 이 전 총리 정국 이후 노 대통령의 ‘시선’을 가름해볼 수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대화정치’라는 말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어딘가 ‘대연정’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야당과도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조언도 실행에 옮기겠다는 의지의 표현 아닌가. 이는 여당에게 탈당과 비슷한 효과를 주고 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치력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청와대에서는 “다가올 국회에서 초당적 협조를 구하는 자리 이상의 아무런 의미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 전 총리 퇴진 이후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을 충분히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 결과 이 같은 회동을 통해 단기적으로는 야당과의 협조를 구해 자신의 정치적 웨이트를 높임과 동시에 여당도 견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 퇴임한 이해찬 총리.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노 대통령은 야당의 당적 이탈 요구에 대해서는 일단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일부에서 거론되던 ‘탈당 뒤 거국내각 구성’의 실현 가능성은 사라진 셈이다. 그럼에도 “정치인 총리는 안된다”는 야당의 요구에 대해서는 “(야당) 마음에 쏙 드는 인사로 (지명)하겠다”는 말로 화답해 중립적인 비 정치인 총리 임명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내비쳤다.
노 대통령의 야당에 대한 이 같은 전향적인 태도는 모두 이 전 총리 사퇴 뒤 다가오는 레임덕의 ‘환상’을 깨는 동시에 여당에게도 긴장감을 주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여야의 회담 분위기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청와대 관계자가 밝히고 있는 점으로 보아 노 대통령의 단기적인 정국 구상은 대화 정치를 통한 ‘관리형 정치’에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순수한’ 대화 정치의 뜻과는 무관하게 5·31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또 한 번 거대한 폭풍이 노 대통령의 입지를 흔들어놓을 수 있다. 특히 정동영 의장이 이끄는 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경우 당·청 간 책임론 공방이 벌어지게 되고 이는 곧 레임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시나리오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 전 총리 사퇴 정국을 거치면서 노 대통령은 더 이상 정치권에 역발상의 충격 요법을 쓰지 않을 것 같다. 그럴 만한 추동력도 없고 조기 레임덕에 대한 우려와 임기 하반기의 국정 운영에 대한 부담 때문에 과거와 같은 노무현식 깜짝쇼는 없을 것 같다”고 전제하면서 “노 대통령은 지방 선거 뒤 무조건 탈당할 것 같지도 않다. 대신 정 의장을 ‘무력한’ 인물로 만들 것이다. 선거에 졌다고 해서 무조건 정 의장 허물기 작전을 쓰기보다는 당의 내분을 ‘당에서 해결하라’는 입장으로 묵묵히 지켜볼 것이다. 그럴 경우 노 대통령은 당의 내분에 대한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지고 정 의장에게도 싸울 명분을 주지 않을 것이다. 당은 최악의 경우 분당 사태로 접어들 것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철저하게 당을 방기하며 새로운 정계개편을 대비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노 대통령은 향후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패하더라도 정 의장을 직접 내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 예상이다. 당의 분열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면 대전환 차원에서 탈당 등의 수를 통해 당과 거리를 두고 양극화 해결 등 국정과제에만 전념할 가능성은 더 높다. 이럴 경우 노 대통령은 지방선거의 책임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차기 주자인 정 의장과의 갈등 없이 서서히 그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게 된다.
지난 몇 차례의 당·청 간 갈등이 있을 때마다 열린우리당에서는 ‘노 대통령이 당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많이 흘러나왔다. 특히 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한다면 더 이상 당을 지킬 명분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새 판짜기에 나설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노 대통령의 장기적 정국 구상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노 대통령은 친노 직계 세력을 움직여서 신당 창당 내지는 정책연합 형태의 정치 결사체를 만들어 대권 경쟁에 뛰어들 것이다. 이해찬 전 총리나 유시민 복지부 장관 등을 등에 업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대선 뒤에도 친노 세력 중심의 정치 결사체를 통해 내각제 개헌 등에도 대비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의 장기적 계획은 친노 세력의 소수 정예부대를 이끌고 신당 창당을 한 뒤 ‘그들만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예상이다. 신당 창당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 결사체를 만들어 내각제를 고리로 한 정계개편 정국에 한 축을 형성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계획은 정 의장 세력이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몰락하고 고건 전 총리나 김근태 최고위원 등의 새 인물을 중심으로 새 판짜기가 이루어질 때를 염두에 둔 포석이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여당은 지방선거 뒤 무조건 분열하게 돼 있다. 차기는 김근태 최고위원이 맡을 것이지만 노 대통령이 그 카드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퇴임 후 정치적 입지 마련을 위해서도 친노 세력 중심의 정예세력을 정치 세력화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 청와대 출입기자는 노 대통령의 신당 창당 구상에 대해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는 시대적 명분과 확실한 정치 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노 대통령은 권력의 확실한 중심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레임덕에 빠져 있는 퇴임을 앞둔 대통령에게 힘이 있겠는가. 친노 세력이 있긴 하지만 노 대통령을 끝까지 보호해 줄지는 의문이다”라고 밝혔다.
정가의 여러 관측을 종합해보면 노 대통령은 단기적으로는 야당과의 대화 정치를 통한 안정적 정국 운영을 꾀할 것이다. 중기적으로는 지방선거 뒤 여당의 분열과 거리를 두면서 국정 하반기를 마무리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신당 창당 등을 통해 퇴임 뒤의 정치 재개에 대비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로드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충분조건’인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